마태복음 23 : 25~39 지옥 판결이 예고된 위선자들
신앙인의 겉과 속 23: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죄악의 분량 23:29~39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청년들이 종교적인 '퍼포먼스'에 지쳐 교회를 떠날 때, 주님은 그 종교적 껍데기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셨습니다.
1. 내용 요약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며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겉모습과 종교적 형식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닦아내지만,
내면은 탐욕과 방탕, 죽은 뼈(불법)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를 비판하며 자신들은 의롭다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하는 조상들의 악행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향한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품으려 했던 애통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을 쏟아내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이 본문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적 관습과 정치적 긴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회칠한 무덤 : 유대인들은 유월절 기간에 순례자들이 무덤을 밟아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에
하얀 석회 가루(회)를 칠했습니다. 겉은 하얗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 속은 시체가 썩고 있는 부정한 장소라는 이 이미지는,
거룩을 가장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최고의 반어법입니다.
선지자의 무덤과 비석: 당시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자신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바로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영적 자손임을 지적하십니다.
아벨부터 사가랴까지: 구약 성경(히브리 성경)의 순서상 첫 순교자(아벨)와 마지막 순교자(사가랴)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가 반복해 온 거부와 불순종의 역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점에서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우선순위의 신학: 내면의 정결
예수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종교적 행위가 마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정직)이 삶의 형식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학적 비판: '위선'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는 시도이며,
종교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근본적인 죄악입니다.
② 죄악의 분량과 세대적 책임
주님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에도 '임계점'이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으시지만, 보낸 선지자들과 아들마저 거부하는 순간 그 세대는 누적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역사의 심판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③ 심판 속에 담긴 애통함: 하나님의 모성
심판의 선언 끝에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파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자녀를 향한 찢어지는 아픔'에서 기인함을 보여줍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거절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날개 아래)를 거부한 결과임을 명확히 합니다.
이 본문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저주라기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을 향한 심폐소생술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스펙(겉)'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방탕한 속'을 보십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교회 다니는 청년'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해도 안을 닦아내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인가?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껍데기 신앙을 깨고, 정직한 심장으로
: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하나님
본문: 마태복음 22:15~22

도입
우리는 무엇에 지쳐 있는가?
인스타그램 '필터'의 삶
여러분, 오늘 아침 인스타그램이나 SNS를 확인하셨나요?
우리는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시대를 삽니다. 가장 맛있는 음식, 가장 행복한 표정, 가장 완벽한 구도...
우리는 필터를 끼우고 보정하며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업로드합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마저 '필터'를 끼고 하고 있지는 않나요?
교회에 오면 '거룩한 필터'를 장착합니다. 찬양할 때는 누구보다 뜨겁고, 리더로서 누구보다 성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필터를 걷어낸 '진짜 나'의 모습, 혼자 있을 때 내 영혼의 민낯은 어떤가요?
어쩌면 텅 비어 있거나,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죄의 냄새로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종교적 연기의 피로감
오늘날 많은 청년이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종교적 연기'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나는 괜찮은 척해야 해."
"나는 믿음이 좋은 척해야 해."
"나는 변화된 척해야 해."
이 무거운 연극이 우리를 '영적 번아웃'으로 몰아넣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말라가는 이 괴리감이 우리를 교회가 아닌 세상으로 도망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진단: 회칠한 무덤 (27절)
오늘 예수님은 그 '필터'를 거칠게 찢어버리십니다. 당시 가장 신앙적으로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은 충격적인 비유를 던지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당시 유대인들은 무덤을 깨끗해 보이게 하려고 하얀 회를 칠했습니다.
겉은 눈부시게 하얗지만, 그 안에는 썩어가는 죽음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스펙 뒤에 숨겨진 우리의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십니다.
오늘의 목적: 죽은 자를 살리는 심폐소생술
여러분, 오늘 주님의 이 무서운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이려는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껍데기만 남은 채 죽어가고 있는 우리 영혼을 향한 '긴급 심폐소생술'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을 벗고,
주님 앞에서 '정직한 가난함'으로 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잘 가꾸어진 '무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비록 냄새나고 더러울지라도, 문을 열고 주님을 환영하는 '살아있는 집'을 원하십니다."
'위선에 대한 혐오감'과 **'연기하는 피로감' 충분히 생각해봐야합니다.
"예수님도 너희만큼 위선을 싫어하신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때,
청년들은 주님의 날카로운 책망을 나를 향한 사랑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회칠한 무덤
: 겉모습이라는 우상 (25~28절)
잔과 대접의 비유: 사용 불가능한 인생 (25~26절)
예수님은 먼저 아주 일상적인 '잔과 대접'의 비유를 드십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5절)
여러분, 설거지할 때 컵의 겉만 닦고 안을 닦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겉이 아무리 번쩍거려도 안이 더러우면 그 컵은 '사용할 수 없는 컵'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인 직분, 봉사 경력, 세련된 기도 말투... 이것은 '컵의 겉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탐욕과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방탕이 가득하다면,
하나님은 그 인생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안은 명확합니다.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절).
신앙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마음)에서 밖(행위)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무덤: 거룩의 위장술 (27~28절)
두 번째 비유는 더 강력합니다.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 되면 무덤에 하얀 석회 가루를 칠했습니다.
밤에도 잘 보이게 해서 사람들이 무덤을 밟아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반전: 겉은 화사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깨끗해 보입니다.
실체: 그 속에는 썩어가는 시체와 죽음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회칠'의 달인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거룩을 연기했지만,
주님은 그 화려한 대리석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죽은 뼈'를 보고 계셨습니다.
위선의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위선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박수 소리에 중독될 때, 우리 영혼은 조용히 '회칠한 무덤'으로 변해갑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은 혹시 '회칠'된 상태는 아닌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스펙'을 쌓으려 합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괜찮겠지?"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의 스펙이 아니라 우리의 스피릿을 보십니다.
깨끗한 척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깨끗한 척하는 무덤보다, 더럽더라도 정직하게 열려 있는 죄인의 마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안을 닦는 유일한 방법은 내 수치심을 주님 빛 앞에 그대로 노출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로 안의 더러움을 덮으려 하지 마십시오. 덮으려 할수록 썩어가는 냄새는 진동합니다.
덮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열어서 주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유전되는 죄: 조상 탓과 자기 의 (29~33절)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착각 (29~30절)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고 비석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익숙한 말입니까?
"나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꼰대 같은 신앙은 물려받지 않을 거야."
"나는 저 위선적인 리더들과는 달라."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나는 그들보다 의롭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주님이 경고하시는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비판하면서 닮아가는 죄 (31절)
예수님의 통찰은 날카롭습니다.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비판하고 있었지만,
정작 조상들이 그토록 박해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세웠지만, 실상은 그 조상들의 길을 똑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위선을 혐오한다고 해서 우리가 진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위선을 비판하는 그 마음의 중심에 또 다른 '교만'과 '자기 의'가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바리새인이 될 뿐입니다.
(죄의 분량: 쏟아지는 심판 (32~33절)
주님은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여기서 '분량'이란 죄의 임계점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거절하고 위선으로 그 거절을 포장할 때, 그 죄의 잔은 가득 차게 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주님의 이 거친 표현은 감정적인 욕설이 아닙니다.
진리를 거부하고 종교라는 껍데기로 생명을 죽이는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선포하시는 사망 진단서와 같습니다.

ㅡ나도 똑같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의 가식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껴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저렇게 위선적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교회 안 다니고 정직하게 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몇 년 후, 그가 친한 친구를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교회 사람들 위선적이라고 욕하며 나왔는데, 세상 나와서 살아보니까 나도 똑같더라.
아니, 어쩌면 나를 감시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더 교묘하게 나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더라.
"우리의 적은 '교회의 위선'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은 죄의 본성'입니다.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는 동안, 우리는 정작 내 안에서 자라나는 죄의 분량을 보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위선을 손가락질하는 그 손가락이, 사실은 나도 똑같은 죄의 자손임을 증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다르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을 때만, 우리는 비로소 진짜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암탉의 탄식: 심판 너머의 눈물 (34~39절)
누적된 역사의 심판 (34~36절)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첫 순교자인 아벨부터,
성전에서 죽임당한 사가랴까지의 모든 피의 책임을 이 세대가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와 지혜 있는 자들을 보내셨지만, 인간은 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독한 '인내'를 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수천 년을 참고 또 참으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성: 암탉의 날개 (37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사효 선고를 내리시던 주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리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찢어지는 아픔을 견디며 부르는 애가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주님은 독수리처럼 우리를 낚아채려 하신 것이 아니라, 암탉처럼 우리를 품어 보호하려 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따뜻한 날개 아래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심판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지옥의 판결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요? "너희는 이제 끝났다"가 아닙니다.
"제발 이제는 그만하고 내 품으로 돌아오라"는 가장 처절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주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껍데기뿐인 종교 생활을 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ㅡ어느 청년 리더의 고백입니다.
그는 매일 밤 중독적인 죄에 빠져 살면서도
주일에는 누구보다 거룩하게 찬양 인도를 했습니다.
이 '회칠한 무덤' 같은 삶이 너무 괴로워 "차라리 내가 죽거나,
하나님이 나를 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울며 기도할 때 주님이 주신 마음은 뜻밖이었습니다.
"얘야, 언제까지 무덤 문을 잠그고 혼자 울고 있을 거니?
그냥 그 문을 열어라. 내가 그 썩은 냄새 나는 곳으로 들어가 너와 함께 있고 싶구나."
위선을 멈추는 비결은 내가 스스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더러움과 수치를 주님 앞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떠나갑니다.
무덤에서 성전으로, 연기에서 정직으로
위선은 하나님을 밀어내는 담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의 분노는 우리를 향한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만든 '위선'이라는 담장을 허물기 위한 사랑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위선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지 못하도록 거룩이라는 이름의 하얀 석회 가루를 칠해버리는 것입니다.
안을 깨끗이 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스스로 닦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탐욕과 썩은 뼈를 스스로 치울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내 어두운 안으로 모셔 들일 때, 그 빛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정직이라는 가장 큰 용기
청년 여러분, 이제 그만 '필터'를 해제합시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에 칠해진 하얀 석회를 벗겨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 앞에서 정직해지십시오.
"주님, 제 안이 이렇게 더럽습니다. 제 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방탕,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위선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지옥의 판결은 멈추고 주님의 따뜻한 암탉의 날개가 여러분을 덮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완벽함'에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정직함'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살아있는 성전이 되십시오
세상은 끊임없이 여러분의 겉을 보고 등급을 매길 것입니다.
어떤 필터를 끼웠는지, 얼마나 화려한 무덤을 가졌는지에 따라 여러분의 가치를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을 보십니다.
화려한 무덤으로 남지 마십시오.
투박하고 깨지고 냄새나더라도, 주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십시오.
주님은 오늘 여러분의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그 정직한 심장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준비한 '제물'보다, 여러분이 쏟아놓는 '진실'을 더 원하십니다."
묵상질문
01. SNS의 필터처럼, 교회 안에서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거룩한 필터(종교적 연기)'는 무엇인가요?
02.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요즘 내 마음의 잔 속에 가장 가득 차 있는 '탐욕'이나 '방탕'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03. 윗세대나 다른 사람의 위선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나 또한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 있나요?
04.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하나님께 내 연약함을 정직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05. 나를 품으려 하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알면서도, 여전히 내가 '원하지 아니하여' 거부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06. 이번 한 주, 겉을 닦는 노력을 멈추고 '안을 깨끗이' 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내어놓을 나의 솔직한 고백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왔는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 믿음이 좋아 보이고 싶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석회 가루를 우리 영혼에 칠해왔습니까.
그럴수록 우리 안의 죽은 뼈는 더욱 썩어갔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길은 더 멀게만 느껴졌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가 결단합니다. 우리의 겉을 닦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우리의 안을 주님께 열어 보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세리의 정직함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냄새나고 더러운 우리 마음의 잔을 주님께 드립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로만 우리를 씻어 주시고,
성령의 생기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평판에 목매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 머무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배가 연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봉사가 과시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비록 완벽하지 못해 넘어지고 깨질지라도, 주님 앞에서만큼은 가장 정직한 '산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암탉이 새끼를 모음 같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사랑의 음성에
즉시 반응하여 달려가는 우리 모든 청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껍데기뿐인 종교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관계 속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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