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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1절 - 11절 겸손하신 왕, 예언의 성취자

by Lily00112233 2026. 3. 7.

마태복음 21 : 1~11 겸손하신 왕, 예언의 성취자

나귀를 타신 예수님 21:1~5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보좌가 된 겉옷 안장 21:6~11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장 낮은 왕의 즉위식'을 통해 주님은 진짜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1. 내용 요약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이는 "네 왕이 겸손하여 나귀를 탔도다"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아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무리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합니다. 

이 소동 속에 예루살렘 성은 "이분이 누구냐"며 술렁이고, 무리는 "나사렛 선지자 예수"라고 답합니다.

2. 역사적 구조: "두 왕의 대비"
당시의 배경을 알면 이 입성식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보입니다.


승전 퍼포먼스: 당시 로마 황제나 장군이 성에 입성할 때는 거대한 백마를 타고, 

무장한 군인들과 전리품을 거느리며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정복과 지배'의 상징이었습니다.
나귀 새끼 (2, 5절): 예수님은 백마 대신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나귀는 전쟁의 수단이 아니라 '평화'와 '운반'의 짐승입니다. 

주님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왕이 아니라, 평화로 다스리는 겸손한 왕임을 온몸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3절): "주(The Lord)"라는 표현은 만물의 주권자를 뜻합니다. 

평소 자신을 낮추시던 예수님이 입성을 앞두고 

자신의 신성을 당당히 밝히시며 모든 만물이 주님의 계획 아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3. 신학적 구조: "예언의 성취와 호산나"
본문은 구약의 약속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에 집중합니다.

① 예언의 성취 (4-5절)
마태는 의도적으로 스가랴 9:9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약속된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분이 아니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말씀의 성취자'이십니다.

② 겉옷과 나뭇가지 (7-8절)
겉옷을 펴는 행위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는 '복종'과 '왕에 대한 예우'를 뜻합니다(열왕기하 9:13). 

이는 "내 인생의 주권을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③ 호산나의 의미 (9절)
"호산나(Hosanna)"는 "지금 구원하소서(Save us, now!)"라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무리들의 기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
주님의 응답: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이 시선의 차이가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변하지만, 

주님은 그 오해마저 품고 묵묵히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10절)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반드시 '소동'이 일어납니다.

내가 주인 되어 평안했던 가짜 평화가 깨지고,

"예수님이 내 삶에 누구신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지기 때문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보잘것없는 나귀 새끼가 왕을 태우는 영광을 입었듯,

우리처럼 부족한 인생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청년설교

 

가장 낮은 왕의 위대한 입성
:어떤 왕을 기다리고 있는가
본문: 마태복음 21:1~11

 

도입
: 우리는 모두 '백마'를 꿈꾸지만, 주님은 '나귀'를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승리자란 화려한 백마를 타고,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남을 굴복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그런 '백마' 같은 스펙과 배경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오늘,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귀 새끼'를 선택하십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이 세상에서,

왜 만왕의 왕께서는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입성하셨을까요?

진짜 승리는 힘에 있습니까, 아니면 겸손에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왕'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보통 우리는 강력한 권력, 거침없는 영향력, 그리고 성공한 자의 여유를 떠올립니다. 

역사 속의 왕들은 늘 거대한 군대와 화려한 전차, 그리고 위용 넘치는 '백마'를 타고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에게 이 '백마'는 무엇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 고연봉, 탄탄한 스펙, 화려한 인맥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백마를 타기만 하면 세상을 다 가질 것 같고, 비로소 승리자가 될 것이라 믿으며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온 우주의 진짜 주인이신 예수님은 상상도 못 할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마가 아니라, 작고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습니다.
전쟁용 말이 아닙니다. 평민들이 짐을 나를 때 쓰는, 지극히 평범하고 낮은 짐승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태복음 21:5)

세상이 생각하는 왕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왕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겸손하여 나귀를 탔도다"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정의하는 '왕'의 공식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왕'의 공식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진짜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왜 만왕의 왕께서는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입성하셨을까요?

힘입니까, 겸손입니까?
지배입니까, 섬김입니까?
백마의 환상입니까, 나귀의 현실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에 '백마'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은 그 백마의 환상을 깨고, 나귀를 탄 겸손한 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더 높이 올라가라고 백마를 내밀지만, 주님은 더 낮아지기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우리가 쫓는 성공이 주님의 길과 다르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백마를 타지 못해서 실패자야"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에게,

예수님이 선택하신 것이 가장 초라한 '나귀'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로와 충격이 됩니다.

 


본문

 

주권의 선포: "주가 쓰시겠다 하라" (1~3절) 

 


예루살렘, 왕의 공식적인 입성 (1~2절)
예수님은 지금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서 공식적인 즉위식을 거행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막힌 특명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1:2–3)

 

고대 세계에서 왕이 백성의 재산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듯, 

예수님은 스스로를 '주'라 칭하시며 만물의 진정한 소유주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디에 나귀가 매여 있는지,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주님의 철저한 계획과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귀, 왕의 보좌가 되다
본래 나귀는 왕이 탈 만한 짐승이 아닙니다.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평범한 가축입니다.

 

그러나 볼품없는 나귀라 할지라도 '주님이 쓰시면' 

그 즉시 만왕의 왕이 앉으시는 거룩한 보좌가 됩니다.

나귀의 가치는 나귀 자체의 품종이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그 위에 타고 있느냐'가 나귀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평범함이 영광이 되는 순간
혹시 여러분 자신을 '매여 있는 나귀 새끼'처럼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학벌도 평범하고, 집안도 평범하고,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서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어?"라는 낙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에,

훈련된 군마가 아니라 매여 있던 나귀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 부족한 재능, 

남모를 아픔조차 주님이 "내가 너를 쓰겠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도구가 됩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은 나귀 주인에게는 '헌신'의 요구였지만, 

나귀에게는 '존재의 목적'을 찾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에 여러분의 '매여 있는 것들'을 풀어 내어드리십시오. 

주님이 타시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왕의 행렬이 됩니다.

 


 

겸손으로 이기는 왕 (4~5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도다”

(마태복음 21:4–5)


기록된 대로 오신 왕 (4절)
마태는 이 장면을 기록하며 분명히 명시합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입성은 갑자기 기획된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약속된 하나님의 철저한 설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증명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말씀의 성취자'이십니다.

세상의 왕 vs 예언된 왕 (5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 스가랴 9:9 )

 

스가랴 9:9를 인용하며 마태가 강조하는 왕의 특징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당시 로마 장군이나 황제가 입성할 때는 거대한 백마를 탔습니다.

이는 정복, 힘, 군사적 승리, 그리고 적들을 굴복시키는 '공포'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언된 왕은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전쟁용 짐승이 아닙니다. 평화의 시기에 짐을 나르는 짐승입니다. 

주님은 힘으로 억누르는 왕이 아니라, 평화로 치유하는 왕으로 오셨음을 온몸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선택된 가난, 의도된 낮아짐"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돈이 없거나 백마를 구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낮아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진짜 권위는 높은 보좌에서 내려다보는 힘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와 눈을 맞추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이 '겸손'이라는 무기로 세상의 교만과 죄악을 이기려 하십니다.

"우리가 꿈꾸는 승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는 경쟁 사회 속에서 늘 '백마'를 타야 승리한다고 배웁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영향력이 생긴다",

"힘을 가져야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왕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앞두고 가장 낮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여러분의 승리 공식은 무엇입니까? 

남을 밟고 올라가는 백마의 승리입니까, 

아니면 나를 낮추어 공동체를 살리는 나귀의 승리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짜 강함은 겸손에 있단다."

"예언의 성취"라는 말은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수백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오신 주님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주님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주님의 신실함과 겸손을 신뢰하십시오.

 


 

인생의 소동: "이는 누구냐" (6~11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마태복음 21:8 )


겉옷을 펴는 복종: "내 인생을 주님 발아래" 
제자들은 나귀 위에 자신의 겉옷을 얹었고, 무리는 그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유대인에게 겉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분, 소유, 전 재산을 상징합니다.

 

“각기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에 펴고”

( 열왕기하 9:13)


열왕기하 9:13에서 예후를 왕으로 세울 때 옷을 펴듯,

무리는 지금 예수님을 자신의 삶을 통치할 진정한 '왕'으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내 인생의 주권은 내가 아니라 당신께 있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길 위에 펼쳐진 것입니다.


2. 호산나의 외침: 기대와 본질의 차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마태복음 21:9 )


사람들은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를 외쳤습니다.
당시 무리는 로마의 압제라는 정치적 해방을 원했습니다.

"내 형편을 당장 낫게 해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나귀 타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왕이십니다.


3. 예루살렘의 소동: "이는 누구냐" (10~11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마태복음 21:10 )


예수님이 성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이는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진짜 왕이 들어오시면 내가 주인 되어 누리던 가짜 평화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가치관, 내 욕심, 내 계획이 흔들리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 마태복음 21:11)

 

성안의 사람들은 "이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무리는 "나사렛 선지자 예수"라고 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ㅡ보험인가, 왕인가?

어느 청년과 상담할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어요. 하지만 보험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평소엔 제가 알아서 살고, 사고가 날 때만 도와주시는 분 말이에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도움 주는 조력자'로 원하지, 
'주권을 가진 왕(King)'으로 모시기는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내 인생의 '겉옷'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아끼는 스펙, 시간, 재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어깨에 걸치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귀 타신 주님 발아래 깔려 있습니까?

 

소동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내 계획을 흔드실 때, 

그것은 나를 망가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평화를 주시려는 신호입니다. 

내가 왕 노릇 하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소동을 기쁘게 맞이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호산나'이십니다.
정치적 승리나 경제적 성공보다 더 큰 구원, 즉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나귀를 타고 겸손히 오신 그분이 바로 우리 인생의 진짜 승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선지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21장의 입성 장면이 단순히 과거의 퍼레이드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주권의 소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내 인생의 겉옷을 깔아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백마의 정복이 아닌, 나귀의 평화
세상은 끊임없이 화려한 백마를 타라고 부추깁니다. 

더 높은 스펙, 더 강한 힘을 가져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작고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진짜 승리는 타인을 굴복시키는 군림에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겸손에 있음을 십자가를 향한 행진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8)

 

오늘 예루살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던져집니다.


“이는 누구냐”
(마태복음 21:10)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선지자입니까,도움 주는 분입니까
아니면 내 삶의 왕입니까

예수님은 힘으로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겸손한 왕입니다.


여러분의 겉옷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겉옷'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겉옷은 여러분의 자존심이자, 미래에 대한 계획이며, 여러분이 가진 전부입니다.
아직도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내가 이만큼 가진 사람이야"라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귀 타신 주님이 지나가시도록 그분 발아래 깔아드리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주권을 그분께 드린다는 것은, 내 삶에 일어나는 거룩한 '소동'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계획을 흔드실 때, 비로소 진짜 평화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묵상질문


나는 어떤 왕을 기대합니까?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조력자입니까,

아니면 나를 온전히 다스리는 왕입니까?
나는 내 인생의 겉옷을 내려놓았습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주권을 주님 발아래 깔아드릴 준비가 되었습니까?
나는 거룩한 '소동'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내 중심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뒤흔드시는 변화를 환영합니까?



내 인생의 왕좌를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사랑과 겸손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은 승리자가 되려면 더 크고 화려한 백마를 타야 한다고 가르치고, 

더 높은 곳에서 군림하며 힘을 과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 청년들도 그 백마 같은 스펙과 배경을 갖지 못해 늘 불안해했고,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매여 있는 나귀'처럼 초라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보았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화려한 군마가 아닌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음을 보았습니다. 

강함이 아닌 겸손으로,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주님의 위대한 지혜를 깨닫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그 한마디에 이름 없는 나귀가 왕의 보좌가 되었던 것처럼, 

보잘것없는 우리의 일상도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가장 영광스러운 도구가 됨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결단하며 우리의 '겉옷'을 주님 발아래 펼쳐 드립니다. 

내가 주인 되어 입고 있었던 자존심의 옷, 내 힘으로 일궈보려 했던 미래의 계획들, 

그리고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소유들을 이제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맡겨드리오니, 우리를 통치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내 삶 중심에 들어오실 때 일어나는 거룩한 소동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쌓아 올린 가짜 평화가 흔들리고, 

나의 익숙한 죄의 습관들이 무너지는 그 흔들림을 기꺼이 환영하게 하옵소서. 

"이는 누구냐"라고 묻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내 삶의 조력자가 아니라 나의 유일한 '왕'이시라고 당당히 고백하는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비록 작고 연약하지만, 

우리 위에 타신 주님이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걷겠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진짜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