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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29절 - 34절 능력의 주님을 향한 믿음의 부르짖음

by Lily00112233 2026. 3. 6.

마태복음 20 : 29~34 능력의 주님을 향한 믿음의 부르짖음

맹인들을 꾸짖는 사람들 20:29~31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맹인들을 치유하신 예수님 20:32~34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1. 내용 요약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 길가에 앉아 있던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무리들이 그들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려 하지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들의 소원을 물으신 뒤, 그들의 눈을 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치유받은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2. 역사적 구조
길가에 버려진 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거대한 행렬이 충돌하는 구조입니다.

여리고의 길목 (29-30절):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마지막 관문입니다. 

축제 같은 분위기로 예수를 따르는 '큰 무리'와,

그 행렬에 끼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들의 대비는 사회적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의 자손 (30절): 맹인들이 사용한 이 칭호는 정치적·영적 메시아를 대망하는 호칭입니다. 

눈은 멀었으나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영적으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무리의 꾸짖음 (31절): 무리에게 이 맹인들은 거룩한 행진을 방해하는 '소음'이자 '방해물'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약자를 향한 사회적 냉대와 종교적 배타성을 상징합니다.

3. 신학적 구조
본문은 '영적 맹인'이었던 제자들과 '육적 맹인'이었던 이들을 대조하며 진정한 제자도를 제시합니다.

① 간절함의 영성: "더욱 소리 질러"
세상의 장벽(꾸짖음)이 높아질수록 그들의 부르짖음은 더 커졌습니다. 

이는 자신의 비참함을 철저히 인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박한 믿음'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기도가 단순히 요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를 뚫고 주님께 닿으려는 치열한 영적 투쟁임을 보여줍니다.

② 주님의 멈춤: "머물러 서서" 
바쁜 구속사의 일정(십자가를 향한 행보) 속에서도 주님은 소외된 자의 비명에 걸음을 멈추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큰 대의를 위해 작은 자를 희생시키는 곳이 아니라, 

단 한 영혼의 고통을 위해 우주가 멈추는 곳임을 드러냅니다.

③ 보게 됨과 따름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손길은 늘 긍휼의 통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 이후입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릅니다'.

진정한 치유의 목적은 단순히 육적인 편리함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명자의 삶'으로의 초대임을 보여줍니다.

 

 "보지 못하는 제자들 vs 보게 된 맹인들"
20장 전반부에서 제자들은 눈을 뜨고도 '우편과 좌편'만 보느라 주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맹인들은 눈을 뜨자마자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길(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여기서 성취됩니다.

 


청년설교

 

닫힌 눈을 뜨고, 십자가의 길을 보다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20:29–34

 

도입
"감긴 눈을 뜨고, 길을 찾다"

 


인생의 여리고, "결정적 순간의 선택"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마지막 성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중요한 결정을 앞둔 '여리고'가 있습니다.

취업을 앞두고, 결혼을 고민하고, 진로의 문턱에 서 있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잘못된 것을 보는 눈 vs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자들: 눈은 멀쩡히 뜨고 있었지만, 

'누가 더 높은가'라는 권력의 야망에 눈이 멀어 십자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장 정확하게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쳤습니다.
진짜 눈먼 자는 누구입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앞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잘못된 것'에 시선을 빼앗긴 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갈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태복음 20:32)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청년은 이렇게 답합니다.
"주님, 취업하게 해주세요. 안정된 직장을 주세요. 경제적 여유를 주세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그 요구 너머의 본질을 묻고 계십니다.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너는 지금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느냐?"

세상은 우리에게 '스펙'을 쌓아 앞을 보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달아 주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소리 질러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맹인들의 부르짖음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여리고의 길목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깨달은 것은,

'육신의 눈'이 밝은 사람보다 '영혼의 눈'이 뜨인 사람이 훨씬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걷고 계신 예수님의 고독한 발걸음과,

그 발걸음을 멈춰 세운 맹인들의 처절한 외침을 깊이 있게 다뤄야 합니다.

장벽을 뚫는 절박함: "더욱 소리 질러" (29~31절) 

 

1. 십자가의 길목에서 만난 부르짖음 (29~30절)
예수님은 지금 인류 구원의 마지막 관문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 길목에 위치한 여리고는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수많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행렬에서 소외된 채 '길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을 보지 못했으나, 영적인 청력은 살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외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2. 눈먼 자들이 알아본 '다윗의 자손' (30절)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전율을 돋게 합니다.
십자가를 예고하신 주님 곁에서 '누가 높은가'를 다투던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맹인들은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다윗의 자손)'임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눈 뜬 자들은 주님의 길을 보지 못했고, 눈먼 자들은 주님의 정체를 보았습니다.

"기도는 거룩한 투쟁입니다" (31절)
맹인들의 외침이 커지자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꾸짖어 잠잠하라'고 합니다.
무리에게 이들은 거룩한 행진을 방해하는 '소음'이었고, 길가의 '방해물'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꾸짖음'이 있습니다. "네가 기도한다고 상황이 바뀌겠어?", 

"체면 좀 차려라", "바쁜 하나님이 너 같은 사람한테 관심 있겠니?"라는 세상의 조소와 내 안의 절망입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더욱 소리 질러' 부르짖었습니다. 장벽이 높아질수록 그들의 절박함은 더 커졌습니다. 

진짜 기도는 방해물을 뚫고 주님께 닿으려는 영적 투쟁입니다.

 

 


ㅡ취업의 문턱과 다윗의 자손
취업 준비를 하며 수많은 탈락 문자를 받을 때, 
우리 청년들은 세상으로부터 "너는 자격이 없어, 
잠잠히 있어"라는 꾸짖음을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나만 길가에 버려진 맹인 같아요."
"하나님이 정말 내 목소리를 듣고 계실까요?"
맹인들이 무리의 꾸짖음을 뚫고 소리 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내 인생에 답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가장 정직한 비명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잠잠하게 만듭니까?"
지금 여러분의 기도를 가로막는 '잠잠하라'는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체면입니까, 아니면 "해도 안 된다"는 학습된 무기력입니까?

맹인들은 눈은 멀었지만 '기회'를 보는 눈은 살아있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더욱 크게 소리 지르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투박하고 단순한 외침이 하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열쇠입니다.

'정직한 비명'을 회복해야합니다. 

고상하고 세련된 기도가 아니라, 살려달라고,

눈 뜨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그 절박함이 멈춰 계시던 예수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성공의 눈을 뜨려 애쓰는 사람보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결국 끝까지 주님을 따른다는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치유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우주를 멈춘 비명: "머물러 서서" (32~33절)


1. 십자가의 행진을 멈추게 한 것 (32절)
예수님은 지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약 27km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걷고 계십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완성하러 가시는 그 엄중한 발걸음이 돌연 멈춰 섭니다.
멈춤의 이유, 대단한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의 부름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이름 없는 두 맹인의 비명이 주님을 멈춰 세웠습니다.
•신학적 핵심, 하나님 나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단 한 영혼의 고통에 우주가 멈추는 곳, 그것이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2. 주님의 질문과 믿음의 선언 (32~33절)
주님은 빤히 보이는 그들의 형편을 알면서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대조되는 욕망: 앞서 제자들은 '높은 자리(좌우편)'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눈 뜨기'**를 원했습니다.
신앙 고백: 그들의 대답은 단순한 요구를 넘어선 믿음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내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치유의 목적: "보게 되어 따르니라" (34절)


1. 손길이 담긴 긍휼 (34절)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눈을 만지셨습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깊은 내면의 긍휼입니다.
멀리서 명령만 하셔도 될 주님이 굳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삶에 직접 뛰어드시는 주님의 따뜻한 터치입니다.


2. 제자도의 완성: 기적 이후의 삶
기적은 일어났고, 그들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고침받은 뒤 집으로 돌아가거나 성공 가도를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제자도의 완성:

이들은 이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진짜 제자'가 되었습니다.

눈을 떴기에 주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이 비로소 보였고,

그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대상의 차이
20장 초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도 오직 높은 자리와 권력, 

그리고 자신들이 받을 보상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맹인들은 세상의 화려한 보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긍휼만을 구했으며, 

눈을 뜬 후에는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적 상태의 역설
제자들은 시력이 멀쩡하여 눈을 뜨고 있었으나, 

주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였습니다. 

반면, 길가의 맹인들은 비록 육신의 눈은 감겨 있었으나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정확히 알아보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영적 눈이 어두웠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 계산하며 

서로 시기하고 다툼으로써 공동체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터치로 눈을 뜬 맹인들은 자신의 안락한 삶으로 돌아가는 대신,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선택하며 제자도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간증은 병이 낫거나 취업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마무리하며, 기적을 넘어 사명으로 나아가는 결론 및 결단을 선포합니다.

결론


"기적의 완성은 '구경'이 아니라 '따름'입니다"
무엇을 가졌는가 vs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너 무엇을 가졌니? 스펙은 뭐니?"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니?" 

맹인들이 받은 최고의 선물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시력'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었습니다.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기적 이후, 여러분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합니까?
우리 청년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주님, 취업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물질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절박한 '눈 뜨기'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우리의 눈을 만지시고 그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질문은 그다음입니다. 

눈을 뜬 후,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기적을 누리는 것에만 취해 다시 세상의 안락함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본문의 맹인들처럼 곧바로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시겠습니까?

"방향이 기적입니다"
맹인들은 눈을 떴고, 예수님을 보았으며, 마침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진짜 기적은 감겼던 눈이 열린 사건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주님께로 고정된 사건입니다. 

20장 전반부의 제자들은 눈을 뜨고도 길을 잃어 높은 자리만 탐냈지만, 

후반부의 맹인들은 눈을 뜨자마자 길을 찾아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기적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기적을 힘입어 주님의 길을 걷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상질문

 

01. 지금 내 인생에서 예루살렘(사명/결정)으로 가기 전,

반드시 해결받아야 할 '나만의 여리고(결핍이나 문제)'는 무엇인가요?
02. 눈은 뜨고 있지만 정작 주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은 보지 못한 채,

제자들처럼 '성공의 자리'만 탐하고 있지는 않나요?
03. 내가 주님께 부르짖으려 할 때,

나를 잠잠하게 만드는 '무리의 꾸짖음(주변의 시선, 내 안의 불신, 바쁜 일상)'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돌파하고 있나요?
04. 맹인들은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정확히 고백했습니다.

내 삶에서 지식으로 아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 문제를 해결하실 '살아계신 주님'으로 경험한 적이 있나요?
05.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나는 당장의 '문제 해결(돈, 취업)'을 구하나요,

아니면 근본적인 '눈 뜨기(영적 통찰력)'를 구하나요?
06. 만약 내 기도가 응답되어 '눈을 뜨게' 된다면, 

나는 그 기적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싶나요? (내 편안한 삶인가요, 아니면 주님을 따르는 길인가요?)

 


 

보게 하소서, 그리고 따르게 하소서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행렬 곁에서, 

소외된 채 앉아 있던 두 맹인의 부르짖음을 봅니다. 

주님, 솔직히 고백하건대 우리 청년들의 모습이 바로 그 길가에 앉은 맹인들과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고, 

세상의 화려한 행렬에는 끼지 못한 채 소외감과 박탈감 속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는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지도는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정작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은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스펙'은 쌓았지만,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은 쌓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영적 교만과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세상은 우리에게 "네 형편을 봐라, 이제 그만 잠잠하라"고 꾸짖습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며 우리를 주저앉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맹인들처럼 '더욱 소리 질러' 주님을 부르게 하옵소서. 

체면과 형편을 넘어 주님의 긍휼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임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간절한 비명에 가던 길을 멈춰 서시는 주님의 그 따뜻한 사랑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의 눈을 만져주실 때, 단순히 취업의 문이 열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에만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눈을 뜨자마자 주님을 보았던 맹인들처럼, 우리의 영안이 열려 주님이 가시는 길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기적을 누리는 '구경꾼'이 아니라, 기적을 힘입어 주님의 뒤를 끝까지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성공이 아닌 사명으로, 나 자신에서 주님께로 온전히 전환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빛이 되시며, 

우리를 보게 하시고 따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