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 : 69~75
고난 주간 QT 영혼을 일깨운 소리, 통회하는 눈물
베드로의 부인 26:69~74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닭의 울음소리 26:75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1. 내용 요약 (Summary)
대제사장의 집 바깥 뜰에 머물던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과의 관계를 추궁받습니다.
첫 번째는 여종 앞에서 모른다고 회피했고, 두 번째는 앞문에서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갈릴리 억양 때문에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며 부인합니다.
그 순간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처절하게 통곡합니다.
2. 역사적 구조 (Historical Structure)
①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부인 (69~74절)
베드로의 부인은 세 단계로 심화됩니다: 단순 회피(70절) → 맹세하며 부인(72절) → 저주와 맹세(74절).
이는 두려움이 지배할 때 인간의 양심이 얼마나 빠르게 마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실증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의 독특한 방언(억양)을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73절).
베드로가 아무리 신분을 감추려 해도 그의 뿌리와 정체성은 숨길 수 없었음을 시사합니다.
② 닭의 울음과 시간적 배경 (74~75절)
'닭이 우는 소리'는 대략 새벽 3시경, 로마 군대의 세 번째 보초 교대 시간을 알리는 나팔 소리였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느 쪽이든, 고요한 새벽녘에 울려 퍼진 이 소리는 베드로의 잠들었던 영적 각성을 깨우는 강력한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인간 의지의 전적인 무력함 (69~74절)
베드로는 호기롭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이라고 장담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권력자도 아닌 어린 여종의 질문 한 마디에 무너집니다.
신학적 의미: 구원은 인간의 열정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존재인지를 기독론적으로 조명합니다.
② 말씀의 기억: 회개의 기폭제 (75절)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은 닭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떠오른 '예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의 사역: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비록 부인이라는 큰 죄를 지었으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은혜의 통로 안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③ 통곡의 신학: 가룟 유다와의 차이 (75절)
유다는 '후회'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베드로는 '통곡'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신학적 의미: 베드로의 눈물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자신의 추함을 직면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통회'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훗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준비가 되는 영적 세례와 같습니다.
고난 주간, 우리는 베드로의 비겁함에 분노하기보다 그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그가 부인할 것까지 이미 알고 계셨고,
그를 위해 미리 기도하셨습니다(눅 22:32).
"심히 통곡하니라"
이 통곡은 베드로의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장례식의 곡소리가 아니라,
'자기 의'가 죽고 '예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는 산고의 울음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오늘 영적인 실패로 낙심하고 있습니까?
닭 울음소리와 같은 주님의 세밀한 경고가 들린다면,
숨지 말고 밖으로 나가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십시오.
그 눈물이 당신을 다시 살릴 것입니다.
청년설교
닭 울음소리에 담긴 두 번째 기회
:무너짐 이후에 시작되는 은혜
마태복음 26:69~75
도입
: 우리는 모두 '베드로'입니다
청년들에게 던지는 질문: 여러분의 신앙이 무너진 장소는 어디입니까?
여러분, 청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이 처참하게 무너졌던 순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입을 닫았던 순간,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슬그머니 믿음을 숨겼던 순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비겁하게 타협했던 순간 말입니다.
하이라이트 뒤에 가려진 그림자
우리는 보통 누군가 신앙이 흔들리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믿음이 약해서 저래. 기도가 부족해서 무너진 거야."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사람은 다름 아닌 베드로입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가장 열정적인 제자였고,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기롭게 외쳤던 신앙의 하이라이트를 찍던 사람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무너짐의 현장
그런데 그 뜨거웠던 베드로가 무너진 현장은 거창한 고문실이나 형장이 아니었습니다.
한 어린 여종의 사소한 시선, "너도 그 도당이지?"라는 가벼운 질문 한 마디였습니다.
당장 내 앞에 닥친 작은 손해와 두려움 앞에서, 베드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무너져 내립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2천 년 전, 한 비겁한 어부의 실패담으로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정직한 자화상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며, 우리는 베드로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그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비겁한 변명과 처절한 눈물을 통해,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가장 강하다고 믿었던 그곳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보며 비웃곤 합니다.
"어떻게 저 어린 여종 앞에서 저렇게 비겁하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수 있지?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왜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를 만큼 용감했던 사람입니다.
기도를 안 해서였을까요? 그는 3년 동안 기적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무너진 진짜 이유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지독한 '자기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몰랐습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믿는 그 마음,
"나는 이 정도 믿음은 있지"라고 확신했던 그 가장 강한 지점이,
사탄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가장 약한 틈이 되었습니다.
정작 삶의 작은 이익 앞에서는 저도 너무나 쉽게 주님을 잊습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는 한마디를 던질 때,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님의 온유함을 팔아버립니다.
당장 내 눈앞의 작은 손해가 두려워 "나는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지"라는 다짐을 한순간에 배신합니다.
자기 확신이 저를 가장 비겁한 배신자로 만들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무너진 베드로를 보며 우리는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주님을 배신할 만큼의 '위협'이나 '이익'을 만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이 고난 주간의 아침,
"나는 괜찮다"는 가짜 확신을 내려놓읍시다.
내가 가장 자신만만했던 그 신앙의 하이라이트가 사실은 가장 위험한 낭떠러지였음을 인정합시다.
그 절망의 끝에서, 비로소 우리를 다시 살리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자기 확신'의 자리에 덫을 놓습니다."
점진적 붕괴: 두려움이 삼킨 양심 (69~74절)
: 죄의 가속도
여러분, 베드로의 배신은 단 한 번의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점진적 붕괴'였습니다.
1단계(회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70절).
처음엔 그저 상황을 모면하려 살짝 발을 뺍니다.
2단계(맹세): "맹세하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2절).
이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거룩한 이름을 끌어다 씁니다.
3단계(저주): "저주하며 맹세하여..."(74절).
결국 주님을 저주하는 밑바닥까지 추락합니다.
역사적 배경: 숨길 수 없는 갈릴리 억양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촌사람들의 투박한 억양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거칠게 욕을 섞어가며 "나 그 사람 몰라!"라고 외쳐도,
그의 말투(갈릴리 방언)는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이미 '표명'하고 있었습니다(73절).
여러분의 억양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죄는 절대로 멈춰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가속도가 붙습니다.
한 번의 가벼운 침묵이 더 큰 거짓말을 낳고, 결국엔 "나 교회 안 다녀"라는 비참한 선언까지 가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리 '예수쟁이'가 아닌 척 연기해도,
여러분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는 이미 주님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그 '갈릴리 억양'을 억지로 감추려 애쓰지 마십시오.
정체성을 감추려 할수록 우리는 더 비참한 괴물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 잠든 영혼을 깨우는 소리 (74절)
어둠을 뚫고 들려온 소리
베드로가 주님을 저주하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팽개치던 바로 그 순간,
성경은 짧고 강력하게 기록합니다. "곧 닭이 울더라."
심판이 아닌 사랑의 알람
그 새벽 3시, 가장 어둡고 비참한 시간에 울려 퍼진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끝'을 알리는 심판의 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랑의 알람'이었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말했지? 너는 무너질 수밖에 없단다. 하지만 이제 그만 깨어나렴. 내가 너를 보고 있단다."
지금 당신의 닭은 울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늪으로 빠져드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깨울 '닭 울음소리'를 준비해 두십니다.
친한 친구의 뼈아픈 충고 한마디
말씀을 읽을 때 가슴을 찌르는 찌릿한 가책
혹은 오늘 이 설교 중 여러분의 심장을 때리는 한 구절
그 소리가 들린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주님이 아직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소리가 들릴 때가 바로 돌아올 때입니다.

ㅡ작은 균열이 댐을 무너뜨립니다
어느 청년이 처음 취업했을 때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절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작은 타협들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엔 회식 자리에서의 가벼운 침묵이었습니다.
그다음엔 "바쁘니까 이번 주만 예배 빠지자"는 작은 타협이었습니다.
나중엔 "이 정도 거짓말은 사회생활의 지혜지"라며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죄책감이 있었지만, 균열이 커지자 감각이 마비되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어느 날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보며 말합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지? 이제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아."
여러분, 거대한 댐은 폭탄 한 방에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방치된 작은 균열 하나가 결국 수만 톤의 물을 터뜨리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생긴 그 '작은 균열'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지금 닭 울음소리가 들릴 때, 그 균열을 기도로 메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입니다.
무너지는 중에도 들려오는 닭 소리에 집중하십시오."
통곡의 신학: 후회가 아닌 회개로 (75절)
: 상황보다 강한 말씀의 기억
베드로를 다시 살린 것은 닭 울음소리라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명확히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75절).
닭 소리는 세상 어디에나 들리는 일상의 소음일 수 있었지만,
베드로에게 그 소리는 잠들었던 영혼을 깨우는 성령의 알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26의 약속처럼,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순간 회복은 시작됩니다.
유다의 후회 vs 베드로의 통회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같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유다의 후회: "내가 잘못했구나"라는 자기중심적 자책입니다. 그 끝은 절망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파멸입니다.
베드로의 통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추함을 보되,
그 추함보다 더 큰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눈물이 아닌 사랑의 눈물
베드로의 통곡은 "내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는 자존심 상함의 울음이 아닙니다.
"나 같은 배신자조차 미리 아시고 기도해 주신 주님의 그 압도적인 사랑"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진짜 회개는 나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ㅡ깨진 꽃병과 장인의 금가루
유명한 도자기 장인이 아주 귀한 꽃병을 만들었는데,
제자가 실수로 그것을 떨어뜨려 수만 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제자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려 했지만, 장인은 그 조각들을 다 모으라고 했습니다.
장인은 도망간 제자를 비난하는 대신, 밤을 새워 그 조각들을 다시 붙였습니다.
그리고 깨진 틈새마다 '순금 가루'를 채워 넣었죠.
훗날 그 꽃병은 원래의 매끄러운 꽃병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예술품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말했습니다. "깨졌던 흔적이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구나."
여러분, 베드로의 인생은 그날 새벽 박살이 났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배신의 조각들을 모아 '은혜의 금가루'를 입히셨습니다.
훗날 베드로가 "주님, 저 같은 배신자를 왜 다시 쓰십니까?"라고 물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베드로야, 그 깨진 틈으로 나의 은혜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란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그를 무너뜨리는 장례식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 죽고 '예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는 산고의 울음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닭 울음소리가 들립니까? "나는 이제 끝났어"라고 숨지 마십시오.
베드로처럼 '밖으로 나가' 정직하게 우십시오. 하나님은 눈물 없는 완벽함보다,
눈물 있는 진심을 더 기뻐하십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심히 통곡하니라" - 이 울음은 베드로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제자로 거듭나는 탄생의 비명입니다.
자신감보다 깨어있음: 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감정보다 말씀: 회복은 내 감정이 아니라,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후회보다 통회: 나를 깎아내리는 후회를 멈추고,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로 향하는 통회를 선택하십시오.
결론 및 결단
무너짐은 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베드로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수제자라는 자부심,
"죽어도 따르겠다"던 호기는 닭 울음소리 앞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기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울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정직한 눈물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후회'를 넘어 '통회'의 자리로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까?
"나는 이제 안 돼, 이미 늦었어"라며 유다처럼 절망의 길로 가지 마십시오. 밖으로 나가 정직하게 우십시오.
주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눈물은 우리 안의 교만과 가짜 확신을 씻어내고,
우리를 다시 살리는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탄생의 비명
"심히 통곡하니라" - 이 울음은 베드로가 죽는 소리가 아닙니다.
베드로 안의 '자기 의'가 죽고, '진짜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탄생의 비명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직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을 아파하실 뿐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직 회개하지 않는 마음만을 아파하십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흘린 그 통곡의 눈물 자국 위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실패는 주님의 사랑이 일하실 가장 완벽한 무대입니다."
묵상 나눔 질문
01.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숨겨지지 않았던 나의 '정체성'이나 '습관'은 무엇이었나요?
02. 처음엔 가벼운 회피였지만, 점차 맹세와 저주로 이어졌던 베드로처럼 내 삶에 방치된 '작은 타협'은 무엇입니까?
03.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깨우기 위해 사용하시는 '영적 알람(충고, 말씀, 가책)'은 무엇인가요?
04. 실패의 순간, 나를 다시 살렸던 주님의 말씀이나 약속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14:26 묵상)
05. 나를 깎아내리는 '후회'와 주님께로 향하는 '통회'의 차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울 수 있다는 것이 왜 은혜일까요?
06. 이번 고난 주간, 내 안의 '베드로'를 인정하고 다시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내가 오늘 즉시 실천할 '정직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실패를 뚫고 들려오는 사랑의 알람
사랑과 자비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 주님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며 그 곁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던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을 위해 죽겠노라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한 어린 여종의 시선과 작은 손해가 두려워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의 비겁함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 청년들의 정직한 자화상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지독한 자기 확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내 믿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스스로를 믿었던 교만이
우리를 가장 위험한 낭떠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자신만만해하던 그 '자기 확신'의 자리에 덫을 놓았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 힘으로 주님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엎드립니다.
주님, 우리 삶에 울려 퍼지는 '닭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죄의 길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갈 때,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어 주님을 저주하며 멀어질 때,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그 세밀한 사랑의 경고를 듣게 하옵소서.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심판의 종소리가 아니라,
자식의 멸망을 두고 보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의 알람'임을 믿습니다.
누군가의 뼈아픈 충고로, 가슴을 찌르는 말씀 한 구절로 우리를 깨우실 때,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멈추어 서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 우리가 '후회'를 넘어 '통회'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가룟 유다처럼 나 자신을 자책하며 절망의 늪으로 숨어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내어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까지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셨던 그 압도적인 사랑에 항복하게 하옵소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의 눈물이 우리 안의 가짜 확신과 교만을 씻어내는 생명수가 되게 하시고,
그 깨진 조각들 틈으로 주님의 은혜가 더 밝히 빛나게 하옵소서.
특별히 기도합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실패와 실수 때문에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낙망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임을 믿습니다.
그 눈물 자국 위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다시 사명을 맡기실 두 번째 기회를 소망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시작되는 통로가 됨을 선포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 우리 안의 베드로가 죽고 오직 예수로 다시 사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깨진 우리 인생의 조각들을 모아 은혜의 금가루로 다시 빚어내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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