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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1절- 9절 낮아짐을 추구하며 죄와 단절하는 삶

by Lily00112233 2026. 2. 26.

마태복음 18 : 1~9 낮아짐을 추구하며 죄와 단절하는 삶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 18:1~5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죄짓는 데 무능한 자 18:6~9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 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 내용 요약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서열을 차지할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대답하십니다. 

또한,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경고하시며, 

죄를 짓게 하는 신체 부위가 있다면 그것을 찍어내 버릴 정도로 단호하게 죄와 단절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어린아이 (18:2):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 권리나 사회적 지위가 전혀 없는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은 아이의 '순진함'보다는 '사회적 낮음'과 '의존성'에 주목하셨습니다.

연자 맷돌 (18:6): 가축이 돌리는 거대한 맷돌로, 

이를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은 당시 가장 끔찍하고 확실한 사형 집행을 의미합니다.

손, 발, 눈을 찍어냄 (18:8-9): 이는 실제 신체를 훼손하라는 문자적 명령이라기보다, 

죄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한 '극단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유대인 특유의 과장법적 표현입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겸손의 신학: "낮아짐이 곧 커짐이다" (18:1~5)
신학: 하나님 나라의 가치 체계는 세상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자기 증명'과 '업적'으로 크기를 재지만, 천국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의존성'으로 크기를 잽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은 도덕적 덕목을 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필수 조건입니다.

② 긍휼과 배려의 신학: "작은 자 하나를 향한 책임" (18:6~7)
신학: 공동체 내의 연약한 지체(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실수를 넘어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중죄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③ 거룩의 신학: "죄에 대한 거룩한 절단" (18:8~9)
신학: 구원은 값비싼 은혜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이 땅의 지체보다 훨씬 소중하기에, 죄와 타협하기보다 차라리 '불편함'을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죄에 대해 '무능할 정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거룩의 본질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어린아이처럼 있으면 밟힌다, 빨리 어른이 되어 힘을 가져라"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어린아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성공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나요?

 혹은 영생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발목을 잡는 '눈'과 '손' 같은 습관적인 죄가 있지는 않나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며 지옥으로 향하기보다,

주님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잘라내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진짜 남는 장사입니다.

낮아짐의 미학을 배우고, 죄에는 단호한 청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청년설교

 

설교 제목: 거꾸로 오르는 천국 사다리
:낮아짐을 추구하며, 죄와 단절하는 삶
마태복음 18:1–9

 

도입

 

— “누가 더 큽니까?”

 


무한 서열 경쟁 사회의 피로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서열'이 지배하는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학창 시절의 전교 석차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연봉의 액수, 아파트의 평수, 직장의 이름,

심지어 SNS의 팔로워 수까지 끊임없이 숫자로 서열을 매기고 누가 더 '큰 자'인지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이 서열의 사다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의 피곤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서열을 묻는 제자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제자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화산의 찬란한 영광을 목격했고, 주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곧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무거운 예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주님, 그 나라가 오면 우리 중에 누가 넘버원입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이 차지할 보좌의 서열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 주님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실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천국의 가르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지 궁금하냐? 그렇다면 이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한다.”

세상은 위로 올라가야 크다고 하는데, 왜 주님은 자꾸 우리에게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걸까요? 

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기술보다, 죄를 찍어내고 낮아지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서열 경쟁에 지친 우리 영혼이 쉴 수 있는 진짜 '천국의 위대함'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숫자로 증명해야 하는 세상'은 비정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조차 '누가 더 영성이 큰가'를 경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본문 

 

— 천국의 위대함

: 낮아짐의 신비


겸손의 신학: 낮아짐이 곧 커짐이다 (18:1–5)
제자들의 서열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히 '착하고 순수한 성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없는 존재: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법적 권리도, 사회적 지위도 없는 '무력한 존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철저한 의존성: 어린아이는 부모의 돌봄 없이는 한순간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천국은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의존성'이 회복될 때 비로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ㅡ 종이 한 장의 힘


아주 얇은 종이 한 장은 어린아이의 손에도 쉽게 찢어집니다. 
하지만 그 종이가 단단하고 거대한 벽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강한 주먹으로 쳐도 그 종이는 찢어지지 않습니다. 
벽의 강함이 종이의 능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란 나의 약함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하신 하나님께 나를 완전히 밀착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져 주님께 붙어 있을 때, 하나님의 강함이 비로소 나의 능력이 됩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18:4)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빨리 어른이 되어라, 네 힘을 키워라, 너를 증명하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의 가치를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세상에서 큰 자는 나를 크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천국에서 큰 자는 나를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그분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는 자괴감이나,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제 자존심과 힘을 내려놓고 주님이라는 든든한 벽에 밀착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그 낮은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천국의 크기는 여러분의 연봉이나 직함이 아니라,

여러분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낮아짐은 전략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나중에 높아지기 위해 지금 잠깐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정직한 자세가 바로 '낮아짐'이기 때문입니다.


— 공동체의 책임: 작은 자 하나의 무게


긍휼의 신학: 작은 자 하나를 향한 책임 (18:6–7)
예수님은 낮은 자를 향한 배려에 대해 갑자기 충격적이고 강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6)

여기서 ‘연자 맷돌’은 가축이 돌리는 거대한 돌입니다.

그것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가장 끔찍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토록 무서운 비유를 드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공동체 안의 약한 자 한 사람의 영혼이 세상의 그 어떤 성공이나 성취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ㅡ에베레스트의 셰르파

에베레스트 정상에 홀로 서서 깃발을 흔드는 등반가는 위대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오르기까지 길을 안내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위험을 먼저 살핀 '셰르파'가 없었다면 그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천국은 혼자서만 빨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처진 지체의 손을 잡고,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속도를 맞추며 함께 오르는 곳입니다. 
나 혼자 높이 올라갔더라도, 그 과정에서 나 때문에 누군가 실족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그 정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죄의 엄중함 (18:7)
우리는 종종 나의 선택과 행동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합니다.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내 자유인데 이게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영향이 있겠어?”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강한 자의 태도와 무심함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통로가 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름도 빛도 없는 작은 자 한 사람의 눈물을 세상 그 무엇보다 무겁게 여기십니다.

 여러분의 성공이나 자유가 누군가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공동체에 처음 나온 지체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즐기는 나의 문화적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범죄의 유혹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큰 사람은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제어하여 약한 자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공동체 내의 '작은 자'를 살피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나로 인해 견고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천국의 위대함입니다.

우리 모임이 얼마나 뜨겁고 활기찬지보다,
가장 연약하고 소외된 한 사람이 그 안에서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지가
주님께는 더 큰 기쁨이 됩니다.

 


 

— 거룩의 신학: 죄를 향한 단호한 절단


거룩의 신학: 죄와의 단절 (18:8–9)
예수님은 이제 우리의 시선을 내면의 거룩으로 돌리며 더욱 급진적인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마 18:8~9)

이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실제로 훼손하라는 잔인한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가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속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리고 그 죄를 끊어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단호한 절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강조하시는 주님의 절박한 사랑의 음성입니다.

 

 


ㅡ독사에 물린 손가락

산길을 걷다 독사에게 손가락을 물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손가락 하나가 아까워 망설이지 않습니다. 
즉시 칼을 들어 그 부위를 처치하거나 독이 퍼지지 않도록 결단합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보다, 
독이 온몸에 퍼져 목숨을 잃는 것이 훨씬 더 끔찍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는 영혼을 죽이는 독사입니다. "이번 한 번만", "조금만 더"라는 유혹의 끝은 영적 죽음입니다. 
지금 즉시 그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영생을 위한 거룩한 불편함
우리는 자꾸만 죄와 타협하려 합니다.
“이 정도는 사회생활 하면서 어쩔 수 없어.”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나만 유별나게 굴 필요 있나?”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 손과 두 발을 다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더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도덕적인 완벽함이 아닙니다. 

거룩은 '죄와의 단절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지금 누리는 세상의 즐거움과 편안함이 영원한 생명을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유혹의 근원을 잘라내는 '거룩한 불편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무능한 자가 되십시오
세상은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죄 짓는 데 있어서만큼은 '무능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죄의 현장으로 달려가던 발을 멈추고,
죄를 탐닉하던 눈을 돌리며,
죄의 도구로 쓰이던 손을 멈추는 것.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그 습관적인 죄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고리를 단호히 찍어 내버리기로 결단합시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유혹의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님 때문에 '할 줄 아는 것도 안 하는' 그 거룩한 무능력이 세상을 이기는 진짜 실력입니다. 

 


 

결론 및 적용

: 거룩한 낮아짐의 길


1.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올 용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역설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의존의 영성: "강해져라"는 세상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책임: 나만의 성공을 추구하기보다, 내 곁의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지 않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단호한 거룩: 즐거움을 위해 타협하기보다, 영생을 위해 죄를 '잘라내는'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진짜 '큰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은 위로 올라가야 크다고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죄를 즐기는 것이 자유라고 하지만, 

주님은 죄에 끌려가지 않을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진짜 자유인이라고 하십니다. 

진짜 성숙한 공동체는 얼마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있느냐가 아니라, 

가장 약한 지체 하나를 얼마나 소중히 지켜내느냐로 증명됩니다.

성공하고 싶어 안달 난 세상의 마음을 잠시 내려놓읍시다. 

하나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영적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또한, 나의 편안함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거나 나의 영혼을 좀먹고 있다면, 

오늘 그 유혹의 '눈'과 '손'을 잘라내는 용기를 가집시다.

[낮아짐] 내가 대접받으려 했던 자리에서 먼저 섬기는 행동 하나 실천하기.
[배려] 공동체 내에서 가장 조용하거나 소외된 지체에게 따뜻한 안부 묻기.
[단절] 습관적으로 나를 죄로 이끄는 앱, 장소, 혹은 모임을 오늘 하루 '차단'해보기.


묵상나눔질문


1. 내가 요즘 가장 예민하게 '서열'을 느끼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직장 내 위치, 재정 상태, 외모나 인기 등) 그곳에서 '큰 자'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2.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의존'하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평소에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나요,

아니면 "주님, 이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지켜만 보세요"라고 하나요?

3. 우리 소그룹이나 교회 안에서 내가 더 세심하게 배려하고 손을 잡아주어야 할 '작은 자(소외된 지체)'는 누구인가요?

그를 위해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일까요?

4. "눈을 빼고 손을 찍어내라"는 말씀처럼,

나의 영적 건강을 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워서' 혹은 '즐거워서' 차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습관적인 죄는 무엇인가요?

5. 죄를 멀리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은 무엇인가요?

(예: 특정 SNS 앱 삭제, 모임 절제, 정직을 위한 손해 감수 등) 



성공의 사다리를 내려와 주님의 품으로
낮은 곳에 임하셔서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누가 더 큰가"를 묻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오르려 발버둥 치는 우리의 일상을 발견합니다. 

남들보다 앞서야 성공이라 믿었고, 

남들보다 커야 행복이라 믿었던 우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서열 사다리를 오르느라 잊어버렸던 

'영원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 시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내 힘을 자랑하기보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벽에 온전히 밀착되어 살아가는 참된 겸손을 허락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강한 자'로 군림하려다 '작은 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나만의 성취에 취해 곁에 있는 지체의 눈물을 보지 못했던 무심함을 회개합니다.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 하신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가슴에 새기게 하옵소서. 

나 혼자 빨리 정상에 오르는 등반가가 아니라, 

뒤처진 지체의 짐을 나누어 지고 함께 걷는 셰르파와 같은 사랑의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삶 속에 뿌리 깊게 박힌 죄의 유혹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손을 찍어내고 눈을 빼어 버리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독사에 물린 손가락을 지체 없이 잘라내는 지혜처럼, 

우리 영혼을 죽이는 죄의 습관들을 오늘 이 시간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내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며 멸망의 넓은 길로 가기보다, 

주님 때문에 유혹을 거절하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영광스러운 영생의 좁은 길을 걷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직장과 학교,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나아가는 청년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세상이 매기는 숫자의 서열에 주눅 들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됨으로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큰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죄 앞에서는 무능할 정도로 깨끗하고, 사랑 앞에서는 누구보다 유능한 주님의 제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를 낮아짐을 통해 완성하시고 거룩을 통해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