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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21절 - 35절 용서에 담긴 십자가 복음

by Lily00112233 2026. 2. 28.

마태복음 18 : 21~35 용서에 담긴 십자가 복음

제한 없는 용서 18:21~22
21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만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18:23~35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빚을 결산하려는 왕과 같다.
24 왕이 결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나오게 됐다.
25 그런데 그는 빚 갚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에게 그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전 재산을 팔아 갚도록 명령했다.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조금만 참아 주시면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27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찾아냈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으며 ‘빚진 돈을 갚아라!’ 하고 말했다.
29 그의 동료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조금만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가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31 이 일을 본 다른 동료 종들은 너무 기가 막혀서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32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서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원하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34 그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 관리들에게 넘겨주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뒀다.
35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1. 내용 요약
베드로는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한지 묻지만,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이흔 번(490번)'이라도 하라며 제한 없는 용서를 명령하십니다. 이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자신은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받고도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악한 종의 최후를 통해, 용서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경고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일곱 번 (18:21): 당시 유대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가 제안한 '일곱 번'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파격적이고 관대한 제안이었습니다.

1만 달란트 (18:24): 1달란트는 약 6,000데나리온(노동자 16년치 품삯)입니다. 

1만 달란트는 당시 한 국가의 연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액수를 상징합니다.

100데나리온 (18:28): 노동자의 100일치 품삯입니다. 

큰돈이지만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약 60만 분의 1에 불과한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용서의 한계 없음: "측량할 수 없는 은혜" (18:21~22)
신학: 기독교의 용서는 횟수의 산술적 계산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490번이라는 숫자는 용서를 멈추지 말라는 무한한 자비를 의미하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성격과 동일합니다.

② 복음적 탕감: "갚을 수 없는 채무의 변제" (18:23~27)
신학: 일만 달란트는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해결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왕이 빚을 없애준 근거는 종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왕의 '불쌍히 여김(긍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③ 용서의 의무: "용서받은 자의 품격" (18:28~35)
신학: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인색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망각하고 부정하는 '영적 교만'이자 '악함'입니다.

 

용서가 왜 그렇게 힘들까요? 그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준 '백 데나리온'의 상처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너는 방금 나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오는 길이다."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도무지 자격 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흘러넘치는 은혜로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멱살을 잡고 싶은 '백 데나리온'의 누군가가 있나요? 

오늘 십자가 아래에서 여러분의 일만 달란트 영수증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 압도적인 사랑이 여러분의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청년설교

 

일만 달란트의 감격, 백 데나리온의 용서
부제: 용서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복음의 품격
마태복음 18:21–35


도입

— "내 사전에 용서는 없다?"


공정과 인과응보의 시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정'과 '인과응보'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가 준 만큼 받아야 하고,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속이 시원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용서는 복수할 힘이 없는 약자들이나 하는 비겁한 변명"이라며 냉소 섞인 목소리를 던지기도 합니다. 억울하게 당하고도 용서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처럼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베드로의 관대함과 주님의 충격적인 대답
오늘 본문의 베드로 역시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께 아주 위풍당당하게 제안합니다. "주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베드로는 정말 파격적이고 관대한 제안을 한 셈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주님께 "베드로야, 참 너그럽구나!"라는 칭찬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마 18:22)

이것은 숫자를 세지 말고 끝도 없이 용서하라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용서를 받았습니까?
용서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입니다. 기도는 할 수 있고, 헌금도 봉사도 할 수 있지만,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머릿속의 기억이 아니라 가슴 속의 생생한 '감정'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이토록 무리해 보이는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께 어떤 용서를 받았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 '말도 안 되는 용서'를 명령하시는 걸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받은 '일만 달란트'의 압도적인 은혜가 어떻게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 

'백 데나리온'의 상처를 녹여낼 수 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 무한한 용서: 횟수가 아닌 상태의 문제


제한 없는 용서: 계산기를 내려놓으십시오 (18:21–22)
베드로는 주님께 아주 당당하게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18:21) 당시 유대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면 의롭다고 가르쳤기에, 

베드로의 '일곱 번'은 사실 자신의 너그러움을 한껏 뽐낸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계산기를 완전히 박살 내십니다.
“일곱 번만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18:22)

이것은 490번을 세고 있다가 491번째에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를 계산의 영역에서 사랑의 영역으로 옮기라는 명령입니다. 

기독교의 용서는 상대가 자격이 있을 때 주는 '보상'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문 하나님의 은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ㅡ 부모의 용서

어린 자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 어떤 부모도 수첩을 꺼내 "오늘이 489번째다. 
이제 딱 한 번 남았으니 조심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끝없이 용서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녀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가 내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단해야 할 죄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보시기에,
숫자를 세지 않는 무한한 용서를 베푸십니다.

 

용서는 실력이 아니라 복음의 통로입니다
세상은 용서를 '참는 실력'이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용서를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용서: “내가 이만큼 참았으니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자기 증명)
복음의 용서: “내가 셀 수 없는 용서를 받았으니 나도 세지 않겠다.” (은혜의 유통)

"나는 일곱 번이나 참았다"는 말은 아직 내 손에 계산기가 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계산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몇 번째입니까?"라는 질문을 멈추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히는 그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벌써 몇 번째 참아줬는데!"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용서는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의 증명'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횟수로 제한되지 않았듯이, 

우리 역시 그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내 손의 수첩을 덮고 주님의 무한한 자비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 복음적 탕감

: 계산할 수 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채무의 변제 (18:23–27)
예수님은 우리가 왜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지 설명하시며 한 왕과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만 달란트'라는 금액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상상할 수 없는 액수: 1달란트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거금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 16만 명의 1년 품삯이며, 당시 한 국가의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절망적인 상태: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참아주시면 다 갚겠습니다"라고 장담하지만,

사실 우리는 평생을 다 바쳐도 그 이자조차 감당할 수 없는 영적 파산 상태의 죄인이었습니다.

 

 


ㅡ우주적인 빚 탕감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은 지구가 태양을 수조 번 돌아도 다 갚지 못할 만큼 거대합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이 인생의 청구서를 앞에 두고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단 한 번의 결제로 그 모든 빚을 청산하셨습니다. 
우리는 방금 그 엄청난 '탕감 영수증'을 손에 쥐고 십자가 문밖을 막 걸어 나온 사람들입니다.

 

오직 긍휼로 얻은 자유 (18:27)
종이 무릎을 꿇고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애걸할 때, 

왕이 빚을 없애준 근거는 종의 화려한 '상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7)

왕은 종이 빚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불쌍히 여겨(긍휼)' 없던 일로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용서받은 것은 우리의 결단이나 노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압도적인 불쌍히 여기심 덕분입니다.

"탕감의 영수증"을 확인하십시오
청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과거가 너무 무거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주저하고 있지는 않나요? 

혹은 내가 이만큼 봉사하고 헌신해야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노력의 늪에서 나오십시오: 일만 달란트는 우리 노력으로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은혜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빚을 0원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누리는 생명과 평안은 공짜가 아니라, 주님이 대신 지불하신 '일만 달란트'짜리 값진 은혜입니다. 

그 영수증을 가슴에 품고, 더 이상 빚진 자의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오.

'복음의 비대칭성'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빚(일만 달란트)과 우리가 형제에게 입은 상처(백 데나리온)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의 멱살을 잡고 싶을 때,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일만 달란트 탕감 영수증'을 먼저 꺼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압도적인 차이를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 용서의 의무: 백 데나리온의 멱살을 잡지 마십시오

 

모순된 반응: 은혜를 망각한 종 (18:28–30)
일만 달란트라는 상상할 수 없는 빚을 탕감받고 성문을 나선 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찾아내어 멱살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비대칭성: 백 데나리온(약 100일 치 품삯)은 분명 작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방금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약 6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영적 기억상실증: 그는 자신이 받은 거대한 은혜를 성문을 나서자마자 잊어버렸습니다. 

동료가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걸했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18:30)

여기서 비극이 드러납니다. 엄청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정작 남에게는 단 한 뼘의 용서도 베풀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급하거나 인색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왕의 판결: 용서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18:32–35)
소식을 들은 왕은 그 종을 불러 엄히 꾸짖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18:33)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어쩌다 한 번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자'라는 우리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ㅡ오염된 물통

깨끗하고 맑은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물통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에 오염된 물 한 컵이 섞인다고 해서 그 물통 전체가 더러워질까요? 아닙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물의 양이 훨씬 많기에 오염된 물은 금세 희석되어 씻겨 내려갑니다. 
주님의 '일만 달란트' 용서가 우리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오면, 
상대방이 나에게 던진 '백 데나리온'의 상처와 오물은 그 거대한 은혜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복음을 잊은 상태입니다
청년 여러분, 주님은 마지막으로 무서운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18:35)

용서는 선택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단순히 감정이 상한 상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십자가의 복음을 망각한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시선을 돌리십시오: 상대방의 잘못(백 데나리온)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내가 하나님께 받은 탕감(일만 달란트)으로 돌리십시오.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도무지 자격 없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일만 달란트 탕감 영수증'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 압도적인 사랑이 여러분의 닫힌 마음을 여는 유일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용서의 크기'는 곧 '복음의 이해도'와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아직 내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 아래서 여러분의 빚이 어떻게 청산되었는지 깊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용서받은 자의 품격
용서의 의무: "백 데나리온의 멱살을 잡지 마십시오" (18:28~35)

 

은혜를 잊은 종의 비극
일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받고 성문을 나선 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찾아내어 멱살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100일 치 품삯으로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가 방금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약 60만 분의 1에 불과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본질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갚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해 주신 '우주적인 탕감'입니다.

용서는 은혜의 흐름입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은혜가 내 안에서 멈추면 내 영혼도 병듭니다. 

용서는 그 은혜를 밖으로 흘려보내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은 '복음 기억상실증'입니다
상대의 백 데나리온이 내 일만 달란트보다 커 보인다면, 우리는 지금 복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의 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백 데나리온은 실제적인 아픔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실재하며 아픕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먼저 보십시오
상처보다 더 큰 것은 내가 받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내가 받은 탕감 영수증을 다시 확인할 때 시작됩니다.

이제 멱살을 놓으십시오
마음속에서 여전히 붙잡고 있는 그 사람, 그 기억을 이제는 놓아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자체가 나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로 그 감옥 문을 열고 나오십시오.


 

묵상질문

 

01. 내가 마음속으로 '용서의 횟수'를 세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02. 하나님께 탕감받은 '1만 달란트(내 죄)'의 크기를 실감하시나요?
03. 내가 멱살 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상대의 '100데나리온(상처)'은 무엇인가요?
04.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오히려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진 않았나요?
05. 상대의 자격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 때문에 용서하기로 결단할 수 있나요?
06. 오늘 내가 먼저 '멱살을 놓아주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은 누구인가요?


 

일만 달란트의 은혜로 백 데나리온을 녹이는 기도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서 우리 영혼의 장부를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평생을 다 바쳐 일해도, 지구를 수조 번 돌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었던 

'일만 달란트'라는 거대한 죄의 빚을 진 자들이 바로 저희입니다. 

절망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아무 조건 없이 "다 탕감되었다" 선언해 주신 그 압도적인 은혜에 눈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는 그 엄청난 탕감 영수증을 손에 쥐고 십자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나에게 '백 데나리온'의 상처를 준 형제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나에게 던진 무심한 말 한마디, 나를 외면했던 차가운 시선, 

나에게 손해를 끼친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받은 일만 달란트의 용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남이 나에게 진 작은 빚은 끝까지 받아내려 했던 우리의 이기적이고 악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용서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상처는 기억이 아니라 생생한 감정으로 남아 우리의 밤을 괴롭힙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묻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나름대로 참아왔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사실은 우리 자신을 가두는 가장 무서운 감옥임을 깨닫습니다. 

미움과 분노라는 감옥에 갇혀, 주님이 주신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님, 이 시간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십자가의 복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상대방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도무지 자격 없는 용서를 먼저 받았기에 그 은혜의 힘으로 멱살을 놓게 하옵소서. 

내 의지나 인격으로는 불가능하오니, 

주님의 그 거대한 사랑의 파도가 우리 마음의 오물과 상처를 씻어내려 가게 하옵소서.

오늘 결단합니다. 내 손에 꽉 쥐고 있던 상대방의 멱살을 이제는 놓아주겠습니다. 

정죄의 판사가 아니라 긍휼의 목자가 되어,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사람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올려드립니다. 

용서받은 자다운 품격을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하늘의 평화를 누리는 거룩한 처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