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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14절 - 22절 섬김과 순종으로 시작되는 제자도

by Lily00112233 2026. 1. 30.

마태복음 8 : 14~22 섬김과 순종으로 시작되는 제자도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심 8:14~17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8:18~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1. 내용 요약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심으로 사적인 공간에서도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치유받은 여인은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섬김(수종)'으로 반응합니다. 수많은 치유 사역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제자도의 참된 대가가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안락함을 포기하는 삶, 

그리고 그 어떤 인륜적 도리보다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에 두는 '철저한 헌신'이 제자의 길임을 선포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열병과 만지심 (8:15):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열병은 하나님의 징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나병 환자에게 그러셨듯, 여인의 손을 직접 만지심으로 격리된 자를 공동체로 복귀시키십니다. 

치유의 목적이 단순히 '건강'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의 성취 (8:17): 이사야 53:4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고난받는 종'임을 명시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마술적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는 대속적 사랑의 결과입니다.

장사 지내는 일 (8:21): 유대 문화에서 부모의 장례는 가장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먼저 가서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말은 지금 당장 장례를 치르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효도를 다한 '나중에' 따르겠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이 가장 강력한 우선순위조차 하나님 나라 뒤로 두라고 도전하십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회복의 신학: 치유의 목적은 섬김 (8:14~15)
신학: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받자마자 일어나 '수종'을 듭니다.

신앙의 기적은 나의 만족에서 끝나지 않고 '타인을 향한 섬김'으로 완성됩니다.

은혜를 체험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손과 발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② 고난의 신학: 안락함을 포기하는 길 (8:18~20)
신학: 서기관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어디든 따르겠다'고 호기롭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답하십니다. 제자의 길은 보장된 미래나 안락한 거처를 찾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낮아짐과 불편함'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③ 우선순위의 신학: 미룰 수 없는 부르심 (8:21~22)
신학: "내가 먼저 ~하게 하옵소서"는 제자도의 가장 큰 적입니다. 인륜적으로 정당해 보이는 이유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앞에서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영적으로 죽은 세상 풍속)는 그들에게 맡기고, 

산 자는 '지금 즉시' 생명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은혜를 입고 즉시 일어나 섬기는 '이름 없는 여인'과, 

조건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지식인(서기관과 제자)'입니다. 제자도는 입술의 화려한 서약이 아니라, 

오늘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밟는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의 '먼저'는 무엇이냐? 그 '먼저'를 내려놓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은혜의 수종, 순종의 걸음
:은혜 이후에 남는 것

 

(마태복음 8:14–22)


ㅡ은혜는 시작일 뿐, 신앙의 본질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수많은 예배와 수련회를 통해 '은혜의 산'에 오르며 뜨겁게 눈물 흘리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곤 합니다. 

하지만 산 아래 일상의 현장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뜨거웠던 감동은 금세 식어버리고 

다시 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는 기이한 정체기를 겪습니다. 

"말씀은 머리로 이해가 가는데, 왜 삶의 문제는 여전히 나를 짓누를까?"라는 패배감은 많은 청년의 아픈 고백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 문제가 없을 때는 내 신앙이 튼튼하다고 착각하며 적당히 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이라는 긴 가르침을 마친 후, 

마치 시험지를 내밀듯 우리를 치유와 회복의 현장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폭풍은 예외 없이, 반드시 온다." 

신앙의 본질은 안락한 예배당 의자 위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인생의 비바람이 불어닥칠 때 

내 영혼의 기초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통해 비로소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됩니다.

본문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놀라게' 만든 이들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대단한 종교적 경력이나 화려한 기도 실력에 감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장벽을 넘어 주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한 나병 환자와,

공간을 초월해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 꿇은 이방인 백부장의 '생생한 신뢰'가 주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그저 지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과 소중한 이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또한, 열병에서 나은 즉시 일어나 주님을 섬긴 베드로의 장모는 우리에게 '은혜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은혜는 단순히 내 만족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섬김'과 주님을 향한 '따름'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도 자신의 안락함이나 인륜적인 도리를 핑계로 '조건'을 붙이는 이들에게 

주님은 제자도의 엄중한 대가를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병을 고치신 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심히 보십니다. 

은혜는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시작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화려한 종교적 수식어를 늘어놓는 사람보다, 

아무런 조건 없이 말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 삶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 낼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메마른 고백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바뀌어, 

폭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회복의 목적: 나음을 입어 남을 섬기다 (8:14-17)

 

섬김으로 증명되는 은혜의 실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는 열병으로 고통받으며 누워 있던 베드로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만지시자 즉시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치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지점을 기록합니다.

바로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는 대목입니다.

 

그녀는 병이 낫자마자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거나 사람들에게 간증을 늘어놓는 대신,

곧바로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은혜가 단지 개인의 만족이나 체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섬김'으로 흘러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회복된 생명의 에너지를 가지고 주님과 공동체를 섬기며, 다시 삶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ㅡ충전된 배터리의 용도

우리가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는 이유는
화면에 표시되는 '100%'라는 숫자를 보며 흐뭇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충전이 완료되었다면 다시 전등을 밝히고,
기기를 작동시켜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와 영적인 치유는 우리 삶의 에너지를 채우는 과정입니다.
충전된 배터리가 전선에 연결되어 빛을 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은혜로 회복된 우리가 섬김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그 은혜는 목적을 상실한 채 고여버린 에너지가 되고 맙니다.

 

ㅡ병실에서 퇴원한 사람

병실에서 퇴원한 사람의 가장 확실한 회복 증거는
더 이상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라고 과거의 고통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일상의 터전으로 돌아가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단지 짜릿한 체험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걷게 하는 동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그 대속의 은혜는 우리를 '안락함'이라는 감옥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자유의 현장으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받은 자의 책임감'을 일깨워줍니다.

은혜가 감정의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오늘 내가 실천할 작은 섬김이 무엇일까요. 

 


 

"따르겠습니다"라는 말 — 그러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있는가 (8:18-20)
: 화려한 팬클럽이 아닌 고독한 순례자의 길

예수님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한 서기관이 호기롭게 외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보다 멋진 신앙고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화려한 말에 감동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주님은 제자도의 환상을 깨뜨리십니다. 제자의 길은 화려한 스타 강사를 따라다니는 팬클럽 활동이 아닙니다. 

거처조차 불분명한 광야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는 길이 결코 안전하지도, 편하지도 않으며, 네가 누리던 안락함을 포기해야 한다 해도 나를 따르겠느냐?" 

제자도는 일시적인 감동이 아니라 냉철한 '각오'의 문제입니다.

계약서의 작은 글씨 — 우리가 간과한 제자도의 '약관'

우리가 중요한 계약을 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대개 사람들은 서류 상단에 적힌 크고 화려한 제목에만 온 마음을 빼앗깁니다. 
"파격적인 혜택", "보장된 미래", "놀라운 보상" 같은 문구들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축복", "은혜", "치유", "사명"이라는 단어에 열광하며 기꺼이 주님을 따르겠노라 서명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계약서 아래쪽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세부 약관'은 주의 깊게 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작은 글씨'를 들이미시는 분입니다. 
"나를 따르겠다고? 그렇다면 이 조항도 읽어보았느냐?"라고 물으시는 듯합니다. 
그 작은 글씨 속에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단어들이 가득합니다. '불편함', '이유 없는 비난', 
'기득권의 포기', '때로는 고독한 광야길', 그리고 '내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줌'이라는 조항들입니다.

많은 청년이 예배의 감격 속에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라고 서명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 그 '작은 글씨'가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당황합니다. 
"주님, 복 주신다면서요? 왜 내 삶이 이렇게 불편해지나요? 왜 저만 손해를 봐야 하죠?"라며 항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부터 속이신 적이 없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으로 이미 그 대가를 명시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이란, 계약서 상단의 화려한 제목뿐만 아니라 

하단의 그 고통스럽고 불편한 '작은 글씨'에 명시된 대가까지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실질적인 서약입니다. 

신앙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낭만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산서에 기꺼이 내 삶 전부를 지불하겠다는 처절한 각오입니다. 

 

여러분은 그 작은 글씨를 읽고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걷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계약서 끝에 약속된 진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라는 말 — 제자도의 가장 큰 적 (8:21-22)
: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과 우선순위

또 다른 제자가 요청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요청은 인륜적으로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효도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도의 가장 무서운 방해물인 **'나중에'**라는 핑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먼저 취업하고 나서요", "먼저 형편이 좀 나아지면요", "결혼하고 나서요."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 '먼저'의 목록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이 그 어떤 인간적인 도리보다 앞서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도는 내 이해와 상황이 맞아떨어질 때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시는 '지금' 즉시 반응하는 길입니다.

 

 

골든타임의 구조대원 — 영적 긴급 상황에 '나중에'는 없습니다

재난 현장에서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골든타임'이라 부릅니다. 사고가 발생하고 숨이 멎어가는 찰나의 순간, 
구조대원에게 가장 절대적인 명령은 "지금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것입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조대원이 본부의 호출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금 부모님 생신 잔치 중이라 이것만 마치고 갈게요.", 
"밀린 집안일이 좀 있어서 그것만 정리하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 대답들은 도덕적으로나 인륜적으로는 아주 타당하고 정당한 이유들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신의 삶을 돌보는 것이 나쁜 일일 리 없습니다.
하지만 '골든타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 대답은 곧 '죽음'을 방치하겠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구조대원의 개인적인 사정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린 현장 앞에서는 그 어떤 정당한 사유도 최우선순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한 제자의 요청도 이와 같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모의 장례는 그 무엇보다 신성하고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냉정하리만큼 단호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는 효도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이 '영적 골든타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숨이 넘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하는 일은 단 1분 1초도 미룰 수 없는 긴급 상황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영적 구조대원'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취업하고 나서요", "조금 더 안정되고 나서요", 
"이 문제만 해결하고 나서요"라는 말은 제자도라는 긴급 상황실에서는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대답입니다.

우리가 "나중에"라고 미루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영적 골든타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이란 나의 정당한 권리와 인륜적 도리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을 살리는 일을 '먼저' 두는 삶입니다.

부르심 앞에 "나중에"라는 핑계를 내려놓고 "지금 즉시" 현장으로 뛰어드는 사람,
그 한 사람을 통해 주님은 오늘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적당한 타협'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일깨워줍니다. "나의 '먼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나의 '먼저'를 주님께 드립니다" 
적용: 당신이 달고 있는 '조건부 신앙'의 꼬리표 우리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늘 뒤에 단서를 붙입니다. 

"하나님, 취업만 하면 그때부터 제대로 할게요", "이번 고비만 넘기면 헌신할게요",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되면 그때 가서..." 하지만 주님은 그 '나중'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먼저'**의 자리를 지금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중에"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주님보다 내 계획과 안락함을 더 신뢰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타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여러분의 순종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결단: 구경꾼의 자리에서 일어나 섬김의 현장으로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의 감동에 취해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진짜 은혜를 경험한 자는 침대에 누워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만을 묵상하지 않습니다. 

즉시 일어나 주님을 수종듭니다. 오늘 우리도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머리 둘 곳 없는 험한 길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도리와 안락함보다 주님의 부르심을 우선순위에 두는 진짜 제자가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 은혜 이후에 남는 것은 순종이다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인생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름 없는 여인: 은혜를 입자마자 계산 없이 즉시 섬김으로 반응했습니다.
이름 있는 지식인들: 따르겠노라 호언장담하지만, 안락함과 인륜적 도리를 계산하며 조건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단순히 은혜에 젖어 있는 감동의 사람인가, 아니면 삶을 던져 따르는 순종의 제자인가?" 

은혜는 나를 죽음에서 일으키지만, 제자도는 나를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합니다.
은혜는 선물 받는 기쁨이지만, 제자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결단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통과한 순종의 길에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생명과 기쁨이 있습니다.


묵상질문

 

1.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받자마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최근 주님께 받은 은혜나 기도 응답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만족에서 끝났나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섬김'으로 이어졌나요?

2. 예수님은 여인의 손을 만져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님의 따뜻한 '만지심'이 필요한 영적/정서적 열병(분노, 조급함, 무기력, 비교의식 등)은 무엇일까요?

3.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제자의 삶이 안락함만을 보장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면서 내가 포기해야 했던 안락함이나,

여전히 포기하기 가장 힘든 세상적인 보장(안정된 미래, 경제적 거처 등)은 무엇인가요?

4. 한 제자는 주님을 따르기 전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극히 타당해 보이는 이 '먼저'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나의 진짜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솔직하게 돌아봅시다.

5.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며 즉각적인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면'이라며 순종을 미루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무엇이며, 왜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나요?

6.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어 편해지는 것'을 넘어

'문제를 딛고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나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드립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난 치유의 사건과, 

길 위에서 선포된 제자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께 고침 받기를 원하고 은혜 입기를 갈망하지만, 

정작 회복된 후에 즉시 일어나 주님을 섬겼던 여인처럼 살지는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손을 만져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세상의 열병, 

비교의 열병, 조급함의 열병을 꾸짖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새 힘을 얻어, 내가 머물러 있는 가정과 일터, 

그리고 공동체에서 주님을 수종드는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건강과 재능이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거룩한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길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우리는 때로 서기관처럼 화려한 서약만 늘어놓거나, 

또 다른 제자처럼 "먼저 이것부터 하고 나서"라며 핑계를 대곤 합니다. 

세상의 안락함과 보장된 미래를 제자도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으나 머리 둘 곳 없이 길을 가셨던 주님의 그 좁은 길에, 

우리 청년들이 기쁨으로 동참하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하여 주시옵소서. 인륜의 도리보다, 

세상의 풍속보다, 나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중에"라는 미혹에서 벗어나 "지금 즉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종의 세대가 되게 하옵소서. 

제자도는 내 이해와 상황이 맞아떨어질 때 가는 길이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내 모든 것을 던지는 결단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의지합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거친 현장에서도 주님의 손을 놓지 않고 제자의 길을 묵묵히 걷게 하옵소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