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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27절 -38절 깊은 긍휼을 소유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by Lily00112233 2026. 2. 3.

마태복음 9 : 27~38 깊은 긍휼을 소유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바리새인들의 냉소 9:27~34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9:35~38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1. 내용 요약
예수님은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자의 입을 여시며 메시아로서의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무리는 경탄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비방과 냉소로 일관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며 

가르치고 고치시는 사역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고생하며 기진한 무리를 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향해 깊은 긍휼을 느끼시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다윗의 자손이여 (9:27): 두 맹인이 외친 이 호칭은 예수를 단순한 치유자가 아닌, 

구약이 약속한 메시아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육신의 눈은 감겼으나 

영적인 눈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9:30): 이는 '메시아 비밀'이라 불리는 장치로, 

예수님이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받는 것을 경계하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고자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9:34): 바리새인들의 비방은 기적 자체를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 출처를 악마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악의적인 태도입니다. 이는 마음이 완악해진 종교 기득권층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믿음의 신학: "너희 믿음대로 되라" (9:28~29)
신학: 주님은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으나, 

그 능력이 내 삶의 '사건'이 되는 통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인출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② 긍휼의 신학: "불쌍히 여기시니" (9:36)
신학: 본문의 '불쌍히 여기다'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깊은 긍휼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동기는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공명하는 '사랑'이었습니다.

③ 일꾼의 신학: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9:37~38)
신학: 세상은 주님의 눈에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거두어야 할 '추수지'입니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합니다. 여기서 일꾼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선교와 사역의 시작은 '전략'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울고 계신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냉소적인 사람이 되지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세상은 긍휼이 필요한 '황금어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화려한 스펙을 가진 인재가 아니라, 영혼을 보며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긍휼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 "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보는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보는가"를 자문하며 기도로 일꾼의 삶을 시작하길 바랍니다.


청년설교

 

아픔에 공명하는 자, 추수할 일꾼
: 깊은 긍휼을 소유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9:27~38

 

 

왜 우리는 점점 차가워지는가
무감각이라는 방어기제 뉴스를 켜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쏟아지고,

SNS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무뎌져만 갑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하죠. “요즘은 힘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아픔에 일일이 공감하다가는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 ‘느끼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차라리 무관심해지거나, 상대를 판단해 버림으로써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우리에게 공감보다 안전한 것은 ‘무관심’이 되어버렸습니다.

효율과 가성비의 시선 우리는 철저히 효율과 가성비의 시대로 밀려나 있습니다. 

“저 사람을 돕는 게 나에게 이득인가?”, “저 문제는 내 소관이 아니야”라며 타인의 아픔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이런 차가운 시선이 교회 안까지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저 사람은 이래서 문제야”, “저 사역은 저게 잘못됐어”라며 

비판의 날만 세우는 ‘차가운 관찰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적의 장이 아닌 시선의 장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지만,

사실 이 장들의 진짜 주제는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시선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기적을 보고도 “귀신의 왕을 의지한다”며 비아냥거리는 바리새인의 ‘차가운 시선’과,

기진한 무리를 보며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시선’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여러분이 걷는 이 거리를, 여러분이 머무는 그 직장과 학교를 걸으신다면 과연 무엇을 보시고,

무엇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실까요? 당신의 눈에는 지금 무엇이 보입니까? 누군가를 깎아내릴 비판의 거리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사랑해야 할 영혼’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차가운 안경이 벗겨지고, 주님의 뜨거운 심장이 이식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맹인은 보았고, 종교인은 보지 못했다 (9:27~31)
: 믿음의 방향이 능력의 통로를 결정합니다

본문에는 육체의 눈이 닫힌 두 맹인이 등장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앞을 보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비난할 거리를 찾고 있었지만,

앞을 못 보는 이들은 예수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칩니다.

이는 단순히 능력이 많은 치유자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구약이 약속한 메시아,

즉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철저한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쌍한 처지에 감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냉철하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무한한 능력이 이들의 삶에 실재하는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그 능력을 끌어당길 ‘믿음의 통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십니다.

기적의 한계는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크기와 방향에 달려 있습니다.

 

 

응급실의 원칙
— 감정적 호소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주소입니다

병원 응급실은 아비규환의 현장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며 소리를 지르고, 
옆에서 지켜보는 보호자들은 울부짖으며 의료진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그 긴박한 현장에도 철저한 '우선순위'가 존재합니다.
숙련된 의사는 단순히 '가장 크게 소리 지르며
아파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달려가지 않습니다.
의사의 시선은 겉으로 드러난 비명소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처치가 들어갔을 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가장 위급하고도 확실한 지점'을 향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내 상황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습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불쌍합니다.
이 눈물을 보시고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며 감정적인 읍소에 매달리곤 하죠. 
물론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맹인들에게 던지신 질문은 "네가 얼마나 힘드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차갑게 느껴질 만큼 냉철하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님은 우리의 감정적 소모전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주님의 능력을 향해 정확히 조준되어 있는지를 보십니다. 

응급실에서 의사의 실력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처치에 몸을 맡기는 환자만이 살아나듯, 
주님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고백하는 '믿음의 주소'에 반응하십니다.
맹인들은 단순히 "앞이 안 보여서 너무 괴로워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며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능력을 내 고통의 현장으로 끌어당기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영적 응급 구조선'입니다.

내 불쌍함을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다윗의 자손'임을 선포하는 그 믿음의 고백에 승부를 거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눈물이 아니라, 그 눈물 뒤에 가려진 '단단한 믿음'을 보고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확신이다"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여전히 캄캄할지라도,

메시아 되신 주님의 능력을 인출할 '비밀번호'를 잊지 말라고 격려해 주세요.


기적 앞에서 갈리는 두 반응 (9:32~34)
: 팩트는 보지만 진실은 보지 못하는 냉소

귀신 들려 말 못 하던 자의 입이 열리는 경이로운 사건 앞에서 현장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무리는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을 의지한다"며 독설을 내뱉습니다. 

기적이라는 동일한 팩트를 목격하고도 결과가 정반대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적 자체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람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는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고 안경을 썼기에,

눈앞의 생명이 살아나는 기쁨보다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불편함에만 집중했습니다.

냉소주의는 영혼을 서서히 죽이는 가장 무서운 암세포와 같습니다.

 

깨진 안경 렌즈
— 내가 보는 세상은 내 마음의 투영입니다

안경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렌즈의 상태입니다. 
만약 안경 렌즈가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면,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피사체와 상관없이 온통 붉게 물들어 보일 것입니다. 

반대로 렌즈에 여기저기 깊은 금이 가 있거나 얼룩이 심하게 져 있다면, 
제아무리 눈앞에 에메랄드빛 바다와 웅장한 명산이 펼쳐져 있어도 
그 풍경은 일그러지고 파편화된 괴물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때 문제는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담아내는 '렌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라는 눈부신 풍경을 보면서도, 
'교만'과 '시기'라는 색깔이 입혀지고 '증오'라는 금이 간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 못 하는 자의 입이 열리는 생명의 역사를 보면서도 
"귀신의 왕을 의지한다"는 해괴한 결론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위협하는 눈엣가시로만 보였습니다. 
렌즈가 오염되니 진실은 보이지 않고 오직 비판할 거리)만 선명해진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 청년들에게도 무서운 경고를 던집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누군가의 진심 어린 성공이
"운이 좋았을 뿐이야"라는 비아냥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체에 들려오는 기쁜 소식이나 타인의 헌신을 보며 "결국 다 자기 자랑 아니야?"라며
유독 박하고 냉소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흔히 내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대개 우리 마음의 상태가 투영된 결과물입니다. 
세상이 뒤틀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렌즈가 뒤틀려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내가 냉소적인 사람이어서 세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교만과 시기라는 질병이 세상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의 시선이 유독 차갑고 비판적이라면, 잠시 멈추어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깨진 안경을 벗겨 주시옵소서. 타인의 아픔을 아픔으로 보고, 
기쁨을 기쁨으로 볼 수 있는 맑고 투명한 주님의 렌즈를 제 영혼에 끼워 주시옵소서.

" 세상의 풍경을 바꾸려 하기 전에, 내 마음의 렌즈를 닦아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입니다.

 

 

"비판적인 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것일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비방할 거리를 찾는 바리새인의 시선이 혹시 나의 '지적인 방어기제'는 아닌지 돌아보세요. 


 

예수님의 시선 — “불쌍히 여기시니” (9:35~36)
: 사역의 동력은 분노도 의무도 아닌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고 고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역을 가능케 한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36절은 그 비밀을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단순히 '안됐다'는 동정심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신체적 고통을 함께 느끼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문제 많은 군중'이나 '귀찮은 골칫덩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기능'이나 '상황'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영혼의 '결핍'과 '아픔'에 먼저 주파수를 맞추셨습니다.

 

사역은 뛰어난 능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 뜨거운 시선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
— 분석을 넘어선 사랑의 반응

길가에 한 아이가 쓰러져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각자의 '시선'이 있습니다.

어떤 행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합니다. 
"저 아이는 왜 저기 누워 있는 거지? 
요즘 부모들은 애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거야? 
이건 심각한 사회적 안전망의 결여야."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또 어떤 전문가들은 그 장면을 보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논의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우엔 119에 먼저 신고하고, 지자체에 보고해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해." 
이들의 분석과 방법론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정당하며, 때로는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가 그 현장에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부모에게는 분석할 시간도, 비판할 여유도 없습니다. 

아이를 발견하는 그 찰나의 순간, 부모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다 못해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낍니다. 
"아이고, 내 새끼야!"라는 비명과 함께 
몸이 먼저 반응하여 아이에게 달려갑니다. 
아이가 왜 거기 누워 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하나가 부모의 온 우주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스플랑크니조마이', 즉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인 '긍휼'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바로 이 '부모의 심장'입니다. 
우리는 사역을 할 때, 혹은 누군가를 도울 때 자꾸만 세련된 '방법론'을 찾습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도울지, 어떻게 하면 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지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저 사람은 이래서 안 돼"라며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똑똑한 분석가가 아니라, 함께 울어줄 부모다." 
사역은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전략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진하여 쓰러진 영혼을 보며 "누가 저 사람을 돌보지?"라며 
가슴을 치는 그 뜨거운 반응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늘 이 아침,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의 가슴에 '심장 이식 수술'을 하길 원하십니다. 
타인의 아픔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내 아픔'으로 느끼는 부모의 심장 말입니다. 
그 심장을 가진 한 사람, 그가 바로 주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분석을 넘어, 주님의 긍휼이 담긴 뜨거운 반응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주님은 ‘사람’을 찾으신다 (9:37~38)
: 기도로 태어나는 긍휼의 일꾼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주님의 눈에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한 곳이 아니라, 거두어들여야 할 소중한 곡식들로 가득한 황금어장이었습니다. 

문제는 곡식이 아니라 그들을 수확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더 뛰어난 스펙을 가진 사람이나 열심이 특심한 사람을 스카우트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꾼은 치밀한 전략으로 양성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의 아픔 앞에 무너질 줄 알고,

그들을 위해 주님의 심장을 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기도’ 속에서만 진짜 일꾼이 태어납니다.



주님의 눈을 빌려주소서
적용: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을 보십시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기진해 있는 친구, 동료, 가족이 보입니까? 

그들을 판단의 안경을 쓰고 분석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거창한 선교지가 아니라, 내 옆의 영혼을 보며 함께 아파하는 기도가 사역의 시작입니다.

차가운 냉소를 버리고 뜨거운 긍휼로

“주님, 바리새인처럼 차갑게 분석하고 비판하던 나의 냉소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의 심장을 내게 이식하여 주셔서, 기진한 영혼들을 보며 함께 울 수 있는 ‘긍휼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 나의 유익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부르시는 추수 현장으로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제게 주님의 눈을 빌려 주시옵소서.”

 



묵상질문
1. 두 맹인처럼 내 인생에서 주님의 권능이 간절히 필요한 '감겨진 눈(문제)'은 무엇인가요?
2.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질문에 당신은 지금 "그러하오이다"라고 답할 수 있나요?
3. 나도 모르게 타인이나 교회 사역에 대해 바리새인처럼 냉소적으로 반응했던 적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4. 예수님이 느끼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긍휼)'을 누군가를 향해 느껴본 경험이 있나요?
5. 우리 주변에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청년들은 누구이며,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천은 무엇일까요?
6. '추수할 일꾼'이 되기 위해 내가 이번 주에 특별히 품고 기도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차가운 냉소를 넘어, 주님의 심장을 이식받는 일꾼 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그 고통의 깊이에 기꺼이 동참하시는 사랑의 주님,

오늘도 삶의 무게에 눌려 기진한 채 주님 앞에 나아온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두 맹인이 자신의 어둠을 뚫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그 처절하고도 진실한 간절함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닫힌 인생의 문들 앞에 선포되게 하시고, 

우리가 상황의 어두움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바리새인의 완악함을 회개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생명이 살아나는 현장 앞에서도,

 내 유익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조롱하며 

그 은혜를 왜곡했던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적으로는 분석하지만 가슴으로는 울지 못하는 무감각한 종교인의 자리를 떠나게 하옵소서. 

우리 영혼의 깨진 안경을 벗겨 주시고, 기진한 영혼들을 보며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던 

주님의 그 뜨거운 긍휼을 우리 가슴에 이식하여 주시옵소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탄식하신 주님, 

오늘 이 시대가 찾는 일꾼은 화려한 스펙을 가진 자도, 

세련된 방법론을 가진 자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지식은 많으나 마음은 차가운 일꾼이 아니라, 

한 영혼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것을 보며 밤잠을 설치고 

눈물로 기도할 줄 아는 ‘긍휼의 일꾼’을 찾으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바로 그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전략을 짜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게 하시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사랑의 손을 내밀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삶의 현장이 주님의 추수 밭이 되게 하옵소서. 우

리의 눈이 주님의 눈이 되어 소외된 자들을 발견하게 하시고, 

우리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되어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게 하옵소서. 

나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계산하는 ‘계산기 신앙’을 버리고,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돼지 떼를 포기할 줄 아는 거룩한 낭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길 잃은 양들을 위해 친히 목자가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심장을 다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