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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13절 - 29절 열매로 증명되는 성도의 신앙

by Lily00112233 2026. 1. 28.

마태복음 7 : 13~29 열매로 증명되는 성도의 신앙


좁은 문과 좁은 길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믿음과 행함 7:15~29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 내용 요약
본문은 산상수훈 전체를 마무리하며 제자들에게 '결단과 실천'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선택의 기로(좁은 문과 넓은 문), 영적 분별(열매와 나무),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기준(반석 위와 모래 위의 집)을 제시하십니다.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의 열매'만이 그 신앙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엄중한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2. 역사적 구조
좁은 문과 협착한 길: 당시 유대 도시의 성문 곁에는 짐을 내린 사람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자기 부인의 길을 상징합니다.

거짓 선지자와 이리: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으나 속은 탐욕스러웠습니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처럼, 겉모양은 속일 수 있어도 결국 드러나는 '삶의 방식(열매)'까지는 속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비, 창수, 바람: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우기가 되면 갑자기 물이 불어나는 '와디(Wadi)' 지형이 많았습니다. 기초를 반석까지 파 내려가지 않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이때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인생의 위기나 마지막 심판을 상징합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선택의 신학: 대중성이 아닌 진리 (7:13~14)
신학: 신앙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은 화려하고 사람이 많아 외롭지 않지만, 생명의 길은 고독하고 불편합니다. 

주님은 천국 시민의 삶이 '소수의 길'이며 날마다 선택해야 하는 싸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② 존재의 신학: 고백보다 열매 (7:15~23)
신학: "주여 주여"라는 신앙고백이 바른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노릇과 귀신을 쫓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순종'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없는 사역은 '불법'에 불과합니다.

③ 실천의 신학: 흔들리지 않는 기초 (7:24~27)
신학: 듣는 것으로는 기초가 놓이지 않습니다. 오직 '행함'만이 인생의 주추를 반석 위에 고정합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실천이 없는 신앙은 평소에는 화려해 보여도, 고난의 비바람이 불 때 그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세상은 "얼마나 높이 지었는가"를 묻지만, 주님은 "어디에 지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신앙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나팔 소리에 마음을 뺏기지 마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좁은 길을 걷는 그 정직한 발걸음이 여러분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감동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청년설교

 

아는 신앙에서 사는 신앙으로
: 말이 아니라 집으로 증명되는 믿음

본문: 마태복음 7:13–29

 



"여러분의 신앙은 '감상'입니까, '결단'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영적 콘텐츠'가 풍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을 따라 세계 최고의 설교를 골라 듣고, 세련된 찬양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삶은 그 감동의 크기만큼 변하지 않습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선택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신앙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님, 믿음은 있는데 삶이 안 따라와요. 말씀은 다 아는데 변화가 없어서 괴로워요."

이런 고민 앞에 우리는 애써 자위합니다. "지금은 좀 흔들려도 괜찮아. 큰 문제 없잖아."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이라는 거대한 산을 내려오며 우리에게 아주 서늘하고도 단호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폭풍은 반드시 온다." 신앙의 본질은 평온할 때의 고백이 아니라, 인생의 예기치 못한 비바람이 불어닥칠 때

비로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의 구경꾼 자리를 떠나,

자기 인생을 반석 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당신을 버텨줄 만큼 견고합니까?

ㅡ역사적·신학적 배경: 좁은 문, 열매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주님의 비유들은 당시 청중들에게 매우 생생한 그림이었습니다. 

 

첫째, '좁은 문'입니다. 당시 유대 성벽 큰 성문 곁에는 짐을 내린 사람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자아와 욕망이라는 비대한 짐을 내려놓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의 길을 상징합니다.

둘째, '이리와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보기에 누구보다 거룩한 양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장식이 아니라 '생명'이기에, 결국 삶의 위기라는 계절이 왔을 때 맺히는 '열매'를 통해 그 정체가 폭로됩니다.

셋째, '와디 지형'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마른 골짜기는 평소에는 단단하고 평평해 보여 집 짓기에 안성맞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기가 되어 폭풍우가 치면 순식간에 거대한 강물(창수)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때 귀찮음을 무릅쓰고 지표면 아래 단단한 반석까지 기초를 파 내려가지 않은 집은 여지없이 휩쓸려 내려갑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에 만족하는 자를 '모래 위에 집 짓는 어리석은 자'에 비유하시며,

산상수훈의 결론은 감동이 아닌 '순종의 기초 공사'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신앙은 선택의 문제다 (7:13~14)
산상수훈의 장엄한 가르침을 마친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선택의 기로 앞에 세우십니다. 

주님은 인생에 오직 두 가지 길만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특징을 극명하게 대조하십니다.

먼저 '넓은 길'입니다. 이 길은 문이 크고 길이 넓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에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질문할 필요도 없고, 다 같이 가니까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적당히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편안한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의 끝이 '멸망'이라고 단언하십니다.

반면 '좁은 길'은 문이 작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습니다. 때로는 나 혼자 걷는 것처럼 느껴져 고독하고,

매 순간 세상의 유행을 거스르는 불편함과 높은 영적 기준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불편한 길의 끝에는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대중의 유행을 따르는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고독하더라도 진리를 선택하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연어의 거스름
— 살아있는 청년은 흐름을 거스른다

강물을 따라 힘없이 떠내려가는 것은 죽은 물고기입니다. 죽은 물고기에게는 저항이 없습니다. 
물살이 이끄는 대로, 환경이 떠미는 대로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반면 거센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상류를 향해 치고 올라가는 물고기는 살아있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한 세상이라는 강물은 너무나 거대하고 빠릅니다. 
그 강물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해.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게 지혜로운 거야. 

굳이 그렇게 좁은 길을 가서 손해 볼 필요 없어." 
이 '세속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참 편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생명이 없는 바다, 즉 영적 죽음입니다. 

진짜 살아있는 청년은 그 흐름을 거슬러 '말씀'이라는 상류를 향해 헤엄치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연어처럼 거스르는 삶일까요? 

모두가 '나의 성공'과 '스펙 쌓기'에 매몰되어 옆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고 말할 때, 
주일의 시간을 떼어 예배하고 내 앞길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고민하며 경쟁자였던 
친구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세상의 눈에 미련해 보입니다. 

"누구나 다 즐기는 건데 어때?"라며 도덕적 가치를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눈과 마음을 관리하는 것은 협착하고 좁은 길입니다. 
또한 직장에서 누군가를 비방해야 내가 돋보이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함께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의 장점을 말하는 것은 '분위기 깨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협착하고 좁아 보여도 말씀이라는 상류를 향해 온몸으로 헤엄치며 나아갈 때 
느껴지는 그 거센 저항이야말로, 당신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숨은 차오르고 비늘은 벗겨질지도 모르지만, 
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찾는 이가 적어 외롭더라도, 세상에 떠내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생명의 통로가 되십시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핑계를 버리게 합니다.
진짜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희소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세요.

 

 


 

 

열매로 알리라: 말보다 삶이 정직하다 (7:15~20)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을 검증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무엇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려한 말이나, 교회에서의 직분, 혹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은사로 우리를 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열매'입니다.

신앙에서 열매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루아침에 급조된 성과가 아닙니다. 

삶의 지향점, 반복되는 선택의 순간들,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 튀어나오는 본능적인 반응,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돈과 시간과 욕망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가 

바로 나의 열매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나는 사과나무입니다"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사과를 맺음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할 뿐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낸 삶의 궤적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합니다.

 

 

 

 

가짜 과일과 진짜 나무
— 생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됩니다

화려한 뷔페 식당의 장식장에 놓인 모조 과일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은 언제나 완벽한 색깔과 먹음직스러운 광택을 자랑합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시들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절대 썩지 않으며, 
먼지만 털어내면 늘 새것처럼 빛이 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껍데기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픈 이가 그 과일을 한입 베어 문다 해도, 
거기서는 어떤 즙도, 영양분도, 생명의 맛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전시용 플라스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혹시 이런 '모조 과일'을 닮아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누구보다 완벽한 종교적 언어를 구사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직분과 경력을 쌓아 올리며,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에서 나오는 생명의 즙이 메말라 있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그 과일을 맛보러 오시는 주님의 입술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반면, 거친 들판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자란 진짜 나무의 열매를 보십시오. 

그 열매는 시장에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로 모양이 일그러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벌레가 먹어 상처 난 자국이 선명하기도 합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끝까지 뿌리를 내린 덕분에 
얻은 진한 단맛과 향기가 있고, 무엇보다 그 속에는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씨앗'이 살아 숨 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박제된 완벽한 경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 발버둥 치다 얻은 '영광스러운 상처'가 있는 열매입니다.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정직을 선택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먼저 용서를 구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그 투박한 순종의 열매 말입니다. 
겉보기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생명의 씨앗을 품고 주님의 뜻을 붙들려 애쓰다 맺힌 
그 한 알의 열매가 주님께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진짜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주여 주여”의 충격: 종교와 관계의 차이 (7:21~23)
이어서 주님은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서서 외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점은 이들이 무신론자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역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서늘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이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이용'했지만,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역은 화려하게 펼쳤지만, 정작 일상에서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신앙은 실적의 문제가 아니라 친밀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느냐보다,

우리가 얼마나 그분과 함께 걸었느냐를 보십니다.

'사역의 성과'에 가려진 '영적 공허함'을 직면하게 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가?"를 깊이 묵상해보세요. 

 


 

반석과 모래: 인생은 반드시 흔들린다 (7:24~27)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집 짓는 두 사람'의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두 집 모두에게 폭풍이 불어닥쳤다는 점입니다. 

많은 청년이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인생에 비바람이 안 오겠지"라고 기대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말씀을 듣는 자나 듣지 않는 자나 인생의 비, 창수, 바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두 집의 결정적인 차이는 외형이나 크기, 혹은 지어진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의 차이였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표면 아래 단단한 반석에 닿을 때까지

땅을 파 내려가 기초를 놓았고, 어리석은 자는 눈에 보이는 고운 모래 위에 손쉽게 집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차이를 명확히 정의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의 차이입니다.

신앙의 승부는 예배당 안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예배당 문을 나선 뒤 그 말씀을 삶의 기초로 삼아 얼마나 치열하게 '행동'했느냐에서 갈립니다.

 

 

ㅡ모델하우스와 실거주 주택
보여주기 위한 신앙인가, 살기 위한 신앙인가

신도시 분양 현장에 화려하게 세워진 모델하우스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곳은 누구나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고 싶을 만큼 완벽해 보입니다. 
최고급 자재와 세련된 인테리어, 은은한 조명과 
안락한 가구들로 치장되어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집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집을 지탱할 '기초 공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델하우스는 사람의 거주를 목적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 
오직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잠시 세워진 가설 건축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집은 겉보기엔 성처럼 웅장할지 몰라도, 
실제로 거센 비바람이 불거나 홍수가 나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 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혹시 이런 '주일 예배용 모델하우스'는 아닙니까?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보다 뜨겁게 찬양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모든 진리를 깨달은 양 고개를 끄덕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신앙의 인테리어가 아주 잘 갖춰진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선 뒤 마주하는 삶의 터전에서, 
말씀대로 정직을 지키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원수 같은 이를 용서하는 고통스러운 '기초 공사'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가짜 신앙입니다. 기초 없는 집이 평온한 날에만 그럴듯해 보이듯, 
행함 없는 믿음 역시 인생이 평탄할 때만 그럴싸해 보일 뿐입니다.

진짜 위기는 인생의 폭풍이 불어닥칠 때 찾아옵니다. 
갑작스러운 취업의 실패, 예기치 못한 질병의 고통, 
소중했던 관계의 비참한 붕괴라는 창수가 우리 인생을 덮칠 때, 
우리가 공들여 꾸며놓았던 신앙의 인테리어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은 남들 눈엔 보이지 않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한 구절을 붙들고 묵묵히 파 내려갔던 순종의 기초뿐입니다.
이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 짓기를 멈추십시오.

대신 아무도 보지 않는 일상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삶의 지반까지 깊이 파 내려가 고정하는 진짜 건축을 시작하십시오.
화려한 장식보다 투박한 기초 공사가 우선입니다. 그 순종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을 때,
어떤 비바람이 불어와도 당신의 인생이라는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견고한 처소가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요구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이라는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법도를 선포하신 후, 

우리에게 더 많이 배우라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더 뜨겁게 느끼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긴 말씀을 마치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하나, 바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감동적인 여운이 아니라, 삶의 현장을 향한 단호한 '발걸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신학적 지식을 쌓고 유창한 기도를 드린다 해도, 그것이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결단과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화려한 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앎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들었으면 이제 움직이십시오 
이제 선택의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산상수훈의 수많은 말씀 중 

여러분의 심장을 가장 깊이 찔렀던 한 구절은 무엇입니까? 

그 구절을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주춧돌'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딱 한 가지만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미워하던 사람에게 먼저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아무도 모르게 즐기던 은밀한 죄를 끊어내는 것, 

혹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것... 

그 작은 순종이 여러분의 인생을 반석 위에 고정하는 기초 공사가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 구경꾼의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감정의 파도 위에 지은 허울 좋은 모래성을 허물고, 주님의 말씀이라는 반석을 깊이 파 내려가겠습니다.

세상의 비바람이 불어오고 창수가 나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순종으로 지어진 견고한 집을 오늘부터 다시 짓겠습니다.

나를 부르는 입술보다 나를 따르는 발걸음을 기뻐하시는 주님, 나의 삶을 받으시옵소서."

"순종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안전장치"라는 점을 꼭 알아야합니다. 

 


묵상질문

 

1. 최근 나의 삶에서 남들이 다 하니까 불안함 없이 선택했던 '넓은 길'은 무엇이었으며,

반대로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선택해야 할 '좁은 길'은 무엇인가요?

2. 세상의 유행과 가치관이라는 거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본 적이 있나요?


3. 나무는 말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내 모습과 일상의 치열한 현장에서 맺히는 내 모습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되나요? 


4.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사역의 능력은 나타났지만, 정작 주님은 "모른다"고 하셨던 충격적인 본문을 읽었습니다.

나는 주님을 나의 필요를 위해 '이용'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분의 마음을 아는 '관계'를 맺고 있나요?

주님과 깊은 사귐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5.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기초 공사가 없는 '모델하우스 신앙'이 위기 앞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예: 취업 실패나 관계 붕괴 시 신앙이 흔들렸던 경험) 그때 내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돌아봅시다.

6. 산상수훈의 결론은 '행함'입니다. 오늘 들은 수많은 말씀 중 이번 한 주간 내가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행동'으로 옮길 단 한 가지 구체적인 순종은 무엇인가요? (예: 미워하는 친구에게 먼저 인사하기, SNS 시간 줄이고 기도하기 등)


 

모래성을 허물고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하소서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 영혼의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몇 주간 산상수훈의 높은 산을 오르며 천국 시민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치열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 장엄한 설교를 마치시며 

우리에게 감상이 아닌 결단을, 이론이 아닌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주님,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안일하게 넓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남들 가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대로, 

내 육신의 편안함을 따라 멸망의 문으로 향하면서도 

"주여 주여" 외치는 고백 하나로 스스로를 속여왔음을 회개합니다. 

 

이제는 겉만 번지르르한 모델하우스 같은 신앙을 허물어 버리게 하옵소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그리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주추를 깊이 파 내려가는 기초 공사를 다시 시작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가치관과 유행이라는 거센 강물이 우리를 덮쳐올 때, 

생명 없는 죽은 물고기처럼 떠내려가지 않게 하옵소서. 

비늘이 벗겨지고 숨이 차오를지라도 말씀이라는 상류를 향해 

온몸으로 헤엄치는 살아있는 연어 같은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비웃는 좁은 길일지라도 그 끝에 

주님의 품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사역이 주님을 이용하는 불법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는 세상의 평가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며 내 뜻에 순종했느냐"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에서 맺히는 열매가 겉만 번지르르한 플라스틱 과일이 아니라, 

비바람을 견디며 주님의 은혜로 맺어진 작고 투박한 진짜 순종의 열매가 되게 하옵소서.

이제 삶의 폭풍 속으로 나아갑니다. 취업의 문턱에서, 

관계의 갈등 속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 앞에서 우리 인생의 집이 흔들릴 때, 

우리가 평소에 쌓아둔 작은 순종들이 우리를 든든히 지탱하는 반석이 되게 하옵소서. 

 

듣기만 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가 아니라, 들은 대로 행하여 

결코 무너지지 않는 지혜로운 건축가로 이번 한 주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영원한 주춧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