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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절 - 15절 은밀한 선행, 올바른 기도

by Lily00112233 2026. 1. 24.

마태복음 6 : 1~15 은밀한 선행, 올바른 기도

위선과 자선 6:1~4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6:5~15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 내용 요약
본문은 천국 시민의 경건 생활인 구제와 기도의 태도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인정과 영광을 구하는 '외식(위선)'을 경계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함'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기도의 핵심으로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우선되는 삶,

그리고 타인을 향한 용서가 전제된 신앙의 본질을 선포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나팔을 불지 말라: 당시 성전 헌금함은 나팔 모양의 구리관이었는데, 

동전을 던질 때 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구제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내거나, 

실제 나팔을 불어 가난한 자들을 불러 모으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당시 유대 가옥에서 '골방'은 창고나 가장 은밀한 내부 방을 뜻합니다. 

타인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하나님과 단둘이 대면하는 절대 고독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Battalogeo): 이방인들의 기복적 기도를 뜻합니다.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끝없이 반복하거나 

길게 늘어놓는 마술적 주문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동기의 거룩함: "누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6:1~4)
신학: 신앙의 보상은 '관객'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을 관객으로 삼으면 사람의 칭찬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으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조차

그 선행에 도취되지 않을 만큼 철저히 자아를 비우라는 뜻입니다.

② 관계의 신뢰: "말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질" (6:5~8)
신학: 기도는 설득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중언부언은 하나님을 인색한 신으로 오해하는 불신에서 나옵니다.

기도의 목적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 나라 우선주의: 주기도문의 핵심 (6:9~15)
신학: 주기도문은 기도의 순서를 교정합니다.

나의 필요(양식, 사죄, 보호)를 구하기 전,

하나님의 명예(이름)와 통치(나라)를 먼저 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만이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는

'용서의 연쇄성'을 통해 예배와 삶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세상은 "보여주는 것이 실력"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이 실력"이라고 가르칩니다.

 

SNS에 인증샷을 올릴 수 없는 선행,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까?

그 '은밀함'이 바로 여러분의 신앙이 가짜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박수 소리에 영적 귀를 막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골방의 사람'이 되십시오.

 


관객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나팔'을 버리고 '골방'을 찾는 은밀함의 영성 

〈보이는 신앙에서, 하나님 앞의 신앙으로〉

본문: 마태복음 6:1–15

 — “왜 이렇게 열심히 해도 공허할까요?”

 

매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찬양팀으로 교사로 봉사도 하며,

적지 않은 헌금도 드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은 늘 메말라 있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목사님, 저 정말 신앙생활 열심히 하거든요?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하고 공허할까요?"

 

이런 허무함은 대개 내가 정성을 쏟은 일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나,

당연하게 여겨질 때 찾아옵니다. 우리는 '인증샷'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좋은 곳에 가고, 대단한 성취를 해도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미완성이라 느낍니다.

 

SNS의 '좋아요' 숫자가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신앙마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그 정확한 지점을 짚으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바로 '누구를 관객으로 삼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관객으로 삼으면 사람의 박수가 끝나는 순간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 관객'을 바꾸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연출하고 있습니까?


 

역사적·신학적 배경, 나팔 소리의 연기와 골방의 진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유대 사회의 경건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팔 소리와 구제'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헌금함에 동전을 던질 때

쟁강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거나, 구제할 때 실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주님은 이를 '외식(Hypokrites)', 즉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영광을 이미 받았기에 하늘의 보상은 없다는 냉소적인 선언입니다.

 

둘째, '골방과 중언부언'의 의미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신의 비위를 맞추거나 정보를 주입하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중언부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가 설득이 아닌 '관계와 신뢰'임을 강조하십니다.

타인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가장 은밀한 장소인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는 연설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실적(Performance)'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Intimacy)'이 먼저입니다. 


위선의 본질: "누가 나를 보고 있는가?" (6:1~4)

 

예수님은 우리의 경건이 오염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시며

'외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Hypokrites)'인 이 말은

당시 무대 위에서 가면을 쓰고 목소리를 바꾸어 연기하던 '배우'를 뜻합니다.

즉, 실제 내 삶의 민낯과 사람들 앞에 보여주는 가면이 다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제와 선행은 분명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선한 일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헌금할 때 쟁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게 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리에서 큰 소리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탄 어린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박수를 받는 순간, 하늘의 보상은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셈입니다.

 

ㅡSNS 신앙, 서비스인가 콘텐츠인가?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연탄 봉사를 가서,
실제로 연탄을 나르는 시간보다 '인증샷'을 찍고 보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지는 않나요?
봉사는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의 섬김이 사람들에게 공유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의 서비스'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를 팔기 위한 '신앙 콘텐츠 제작'에 가깝습니다.

 

 

ㅡSNS 인증샷과 이름 없는 기부

어떤 사람은 선행의 현장을 수십 장의 사진으로 남겨 세상에 알리지만,

그 목적은 연탄 한 장의 온기가 아니라 자신의 '천사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반면, 매년 겨울 이름 없이 거액을 기부하며

"누구인지 절대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박수도, 칭찬의 댓글도 없기에 그들의 보상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됩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단호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 "나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어"라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을 만큼 철저한 은밀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낸 성과보다, 그 일을 할 때 품었던 동기와 방향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세워진 '전시용'입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곳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생명용'입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한 분만으로 충분할 때,

여러분의 신앙은 비로소 공허함을 넘어 하늘의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좋아요'와 하나님의 '잘했다' 중 무엇을 더 갈망하는가?"


골방 기도: 관계는 은밀함에서 깊어진다 (6:5~8)

 

예수님은 선행에 이어 기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술대를 대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

기도의 가장 큰 위기는 형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오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정보를 전달하거나

그분을 설득하는 연설이 아니라,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와 나누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흔히 오해하곤 합니다.

유창하고 화려한 말로 조리 있게 설명해야 하나님이 들으실 것 같고,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길게 부르짖어야 응답이 올 것 같으며,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야만 제대로 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중언부언'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명확히 선언하십니다.

"너희 아버지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ㅡ빈 무대 위의 독백 연극배우
보통 객석이 가득 찼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연기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박수가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객석이 텅 비어 있고,
오직 단 한 분,
하나님만이 관객으로 앉아 계신 무대 위에서의 독백과 같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아도
끝까지 진실하게 자신의 진심을 쏟아내는 배우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골방에서 드리는 정직한 기도가 진짜 당신의 신앙입니다.

 

 

 

골방은 단순히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와 시선이라는 소음을 끄고,

오직 하나님의 숨소리에만 집중하는 '단둘만의 시간'입니다.

 

기도가 힘든 이유는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나를 아시는 아버지'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화려한 미사여구를 버리고 골방의 문을 닫으십시오.

거기서 비로소 내 모든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의 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실력이 아니라 신뢰다"라는 말은 새기세요. 


주기도문: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기도의 구조 (6:9~13)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단순히 외워야 할 주문이 아니라,

무너진 우리 인생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영적 설계도'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를 자녀 삼으신 따뜻한 아버지이십니다.

 

기도는 두려움이 아닌 이 자녀 된 신뢰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우선순위를 혁명적으로 바꿉니다.

나의 감정이나 당장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게 합니다.

 

진짜 성숙한 청년은 "하나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라고 떼쓰기 전에,

"주님, 제 삶을 통해 주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내 계획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거대한 통치 안으로 옮겨 심는 일입니다.

 

또한 주님은 10년 치의 보장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을 하나님을 향한 매일의 의존으로 바꾸시려는 뜻입니다.

"내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오늘은 나와 함께 걷자"는 초대에 응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겸손한 자기 인식에서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유혹에 취약한지 인정하는 그 정직한 고백이 우리를 영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ㅡ내비게이션의 목적지 재설정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달릴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입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잘못 입력하면 아무리 고성능 차를 타고 광속으로 달려도
결국 엉뚱한 낭떠러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나의 성공'이나 '나의 안위'라는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질주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인생이 꼬이는 이유는 목적지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기도의 내비게이션을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으로 강제로 재설정해 줍니다.

목적지가 주님의 나라로 분명하게 고정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거친 여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용서: 은혜가 흐르는 통로 (6:14~15)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신 직후, 마치 후렴구처럼 '용서'를 덧붙이십니다.

왜일까요? 용서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흐르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의 빗장을 걸어 잠글 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받아낼 나의 마음 공간이 폐쇄됩니다.

용서는 상대를 좋게 봐주는 자선이 아니라,

막힌 내 영혼의 숨통을 틔워 나를 살리는 가장 강력한 영적 선택입니다.

ㅡ녹슨 수도관과 은혜의 흐름 

수원지에 물이 아무리 가득하고 수압이 강해도,
집으로 연결된 수도관이 녹슬고 찌꺼기로 꽉 막혀 있다면
수도꼭지에서는 녹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는 언제나 폭포수처럼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수도관에 '미움'과 '정죄'라는 오물이 쌓여 있으면,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이 내 삶의 현장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삶이 삭막하다면
내 마음의 수도관이 막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용서는 그 막힌 수도관을 뚫어내는 작업입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내 삶 전체로 시원하게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항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 은밀함의 신비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화려한 '나팔의 무대'에서 내려와

고요한 '골방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너를 증명하라"고 말하며

우리를 비교와 경쟁의 무대로 내몰지만,

하나님은 그 소란스러운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화려한 신앙의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그분은 그저 "나와 함께 있는 시간" 그 자체를 원하십니다.

 

신앙의 깊이는 남들이 보는 광장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결정됩니다.

내가 나팔을 불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말을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내 마음의 신음 소리를 들으십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만이 사람의 박수라는 중독에서 벗어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진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팔을 내려놓고 골방의 문을 닫으십시오

 

이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주님이 주신 이 '은밀함의 영성'을 실천해 봅시다.

이번 한 주,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딱 한 가지의 '은밀한 선행'을 실천해 보십시오.

 

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미사여구의 기도 대신,

단 5분이라도 하나님과 나만 아는 '골방의 대화'를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의가 시끄러운 나팔 소리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대신 골방의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여러분의 진심을 드리십시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의 영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울림과

하늘의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렇게 결단합시다.

 

"주님,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의 위선을 버립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나의 의가 사람을 향한 나팔 소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골방의 깊은 노래가 되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6장 1~15절의 핵심은 '관객의 교체'입니다.

'주기도문'을 천천히 묵상하며 소리 내어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들이 평소 습관적으로 외웠던 그 기도가,

자신의 인생 내비게이션을 재설정하는 강력한 선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묵상질문

최근 내가 했던 봉사, 구제, 혹은 신앙적인 행동 중에서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 서운했거나,

반대로 누군가 알아주었을 때 유독 뿌듯했던 경험이 있나요?

 

우리는 종종 SNS나 대화를 통해 나의 경건함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내가 최근에 불었던 '영적인 나팔 소리'가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인증샷, 신앙적인 조언 등)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소음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하나님과 단둘이 마주하는 '나만의 골방'이 있나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길게 늘어놓거나(중언부언),

감정이 올라와야만 응답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주기도문은 '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게 합니다.

지금 내 기도의 비중은 어디에 더 쏠려 있나요? 

 

현재 내 마음의 수도관을 막고 있는 '미움'이나 '정죄'의 찌꺼기가 있나요? 


 

외식을 버리고 골방의 깊은 울림으로 살게 하소서

은밀한 중에 계시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에 목말라하며,

정작 아버지가 계신 골방의 문은 닫아둔 채 살아왔던 우리의 위선을 회개합니다.

'좋아요'의 숫자에 일희일비하고,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세 서운함에 빠졌던

우리의 얄팍한 신앙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 우리는 사람을 관객으로 삼는 '나팔의 삶'을 내려놓기 원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나 자신조차 나의 의로움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상급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기교 섞인 말로 주님을 설득하려 하기보다,

구하기 전에 이미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아버지의 품에

조용히 안기는 신뢰의 기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 내비게이션을 다시 설정합니다.

나의 야망과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가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게 하옵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매일 신뢰하며,

내일의 불안 대신 오늘의 은혜를 선택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수도관을 막고 있는 미움의 찌꺼기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씻어내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막힘없이 흐르게 하옵소서.

 

보여지는 신앙이 아니라 살아내는 신앙이 되길 원합니다.

이번 한 주,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주님과 깊이 대면함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골방이자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