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 : 1~19
확신이 흔들리고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
세례 요한의 질문 11:1~15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반응하지 않는 불신 세대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 내용 요약
선구자 세례 요한조차 옥에 갇힌 채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른 예수님의 행보를 보며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역의 열매들을 증거로 제시하며,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의 복을 선포하십니다. 이어 요한의 위대함을 치켜세우시면서도,
동시에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이 세대의 영적 무감각(장터의 아이들 비유)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옥에 갇힌 요한 (11:2):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함을 꾸짖다 마케루스 요새에 투옥된 상태입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요한은 심판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으나, 치유와 회복에 집중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신학적 혼란을 겪습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 (11:14): 말라기 4:5의 예언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메시아 강림 직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바로 그 예언의 주인공임을 확증하시며 구약 시대가 요한으로 마감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 비유 (11:16~17): 당시 아이들이 장터에서 하던 '결혼식 놀이(피리)'와 '장례식 놀이(곡함)'를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영적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당시 유대 사회의 완악함을 풍자합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의심과 확신의 신학: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11:6)
신학: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도 고난의 현장에서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성취를 보게 하십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내 기대와 다른 주님의 방식을 수용하며
끝까지 신뢰를 지키는 '비실족(Non-stumbling)'에 있습니다.
② 시대 전환의 신학: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11:12~13)
신학: 요한은 율법과 예언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인물입니다.
이제는 가만히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부르심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며
천국을 '침노(강력한 열망으로 소유)'하는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합니다.
천국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결단의 대상입니다.
③ 반응의 신학: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느니라" (11:19)
신학: 금욕적인 요한은 귀신 들렸다 하고, 세리와 먹고 마시는 주님은 탐보라 비난하는 세대는
결국 '자기 기준'에 갇혀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예수 그리스도)는 비난에 변명하지 않고,
삶의 열매(사역의 결과)로 그 진실성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내 삶은 여전히 감옥 같을까?"라는 요한의 질문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의심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다만, 여러분의 좁은 시야에 주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이 무감각한 시대 속에서, 여러분만은 복음의 선율에 민감하게 반응하길 바랍니다.
천국은 열정적으로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가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그분을 끝까지 신뢰함으로 '실족하지 않는 복'을 누리길 축복합니다.
청년설교
흔들리는 믿음, 변함없는 메시아
감옥에서 던진 질문, 천국을 여는 응답
(마태복음 11:1–19)

도입
— 감옥에서 시작된 가장 정직한 질문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우리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자유로운 자리에 있습니까?
아니면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마음 한편이 차가운 감옥 같은 자리에 있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취업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관계는 꼬이고, 건강마저 나빠질 때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긴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 안에는 이런 질문이 차오릅니다.
“주님, 제가 믿는 분이 정말 주님 맞습니까? 주님 살아계신데 왜 제 인생은 여전히 감옥 같습니까?”
기대와 현실의 간극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 요한도 그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지금은 헤롯의 마케루스 요새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육체의 감옥보다 더 무거운 감옥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기대한 메시아’와 ‘실제로 일하시는 예수님’ 사이의 간극이었습니다.
요한은 불과 심판으로 세상을 뒤엎을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름 없는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과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맞습니까?” 결국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주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3)
이 질문은 신앙을 포기하겠다는 배교의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흔들리는 감옥 안에서 주님을 붙잡으려 던진 ‘가장 정직한 믿음의 외침’입니다.
의심의 침몰인가, 신뢰의 재시작인가?
혹시 주님 앞에 “주님, 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요”,
“제 인생은 왜 여전히 이 모양이죠?”라고 따지듯 묻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믿음의 바깥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내 기대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긋날 때, 당신은 그 의심에 침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요한처럼 다시 주님께 질문하며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시겠습니까?
이 글을 통해 감옥 벽에 가로막힌 우리의 시야가 열려,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진짜 메시아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문
예수님의 세 가지 응답
ㅡ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 "실족하지 않는 자의 복"
의심을 책망하지 않으시는 주님 (11:4~6)
예수님은 요한의 도발적인 질문에 "네가 선지자인데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4~5)
주님은 신학적 논리로 요한을 설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사역의 열매'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내 개인적인 소원을 들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원대한 약속을 성취하시는 '성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정수: 비실족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에 요한의 심장을 울리는 이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6)
이 말씀은 요한을 향한 매서운 꾸중이 아니라, 흔들리는 요한의 손을 꽉 잡으시는 '복의 선언'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의심이 아예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의심의 폭풍이 몰아치는 순간에도,
내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주님께 걸려 넘어지지(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ㅡ안개 속의 등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가 짙은 안개를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안개가 너무 두꺼워 등대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초보 항해사는 등대가 사라졌다고 믿거나 방향을 잃었다고 절망합니다.
세례 요한도 '감옥'이라는 차갑고 축축한 안개 속에 갇혀 등대 되신 예수님을 잠시 놓쳤습니다.
하지만 안개가 끼었다고 해서 등대가 사라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등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예언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등대의 위치를 내 배 쪽으로 옮겨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안개 속에서도 등대의 좌표를 믿고 키(Key)를 고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질문보다 여러분이 실망하여 주님께 등을 돌릴까 봐 더 염려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이 문장을 소리 내어 고백해 보세요.
“주님이 내 기대와 다르게 일하실 때가, 주님이 가장 신실하게 일하실 때입니다.”
내 삶이 여전히 감옥 같아 보일지라도, 그 감옥 너머에서 맹인을 보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사역은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신뢰함으로 '실족하지 않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시켜 주세요.
요한이 가졌던 의심은 사실 주님을 향한 깊은 열망의 반증이었음을 다독여 주시면,
현재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의 두 번째 응답: "침노하는 자의 천국"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포하시는 주님 (11:7~15)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비록 감옥에서 흔들리는 질문을 던졌을지라도,
주님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극찬하십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닦은 구약의 마지막이자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충격적인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1)
이것은 요한 개인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멀리서 바라보고 준비하던 시대의 인물이었지만,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직접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반응하는 자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
이제는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신앙의 시대가 아닙니다. 팔짱 끼고 관망하는 신앙의 시대도 아닙니다.
천국은 그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며 삶으로 치열하게 반응하는 자, 즉 '침노하는 자'에게 허락됩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그 가치를 알아보고 전력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ㅡ 한정판 굿즈와 오픈런
요즘 사람들은 맛집이나 한정판 운동화,
혹은 좋아하는 연예인의 굿즈를 사기 위해
전날 밤부터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추위와 졸음을 견디며 줄을 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우선순위를 뺏기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오늘 내 삶에 가져오기 위해
영적인 '오픈런'을 하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천국은 고상하게 연구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매달리는 간절한 자의 것입니다.
신앙은 '언젠가'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입니까?
“언젠가 믿음이 좋아지면,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핑계는 침노하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결단하는 청년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십시오.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오픈런' 하십시오.
— 예수님의 세 번째 응답: "무감각의 비극"
반응하지 않는 세대를 향한 탄식 (11:16~19)
주님은 당시 사람들을 '장터에 앉아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아이들이 모여 결혼식 놀이를 하려고 피리를 불어도 상대방은 춤추지 않습니다.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슬피 울어도 상대방은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주님이 탄식하신 '영적 마비'의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금식하며 거칠게 살자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고,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자 "먹기를 탐하는 자"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요한의 엄격함에도, 예수님의 따뜻함에도 그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 갇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굳어버린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열매로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비난 앞에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19)
참된 지혜(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비난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결국 그 복음이 빚어내는 삶의 열매, 변화된 영혼, 회복된 현장을 통해 그 진실성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ㅡ박수 치지 않는 관객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에서 영혼을 울리는 연주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귀를 막고 핸드폰만 보며 비웃고 있다면,
그 공연은 연주자의 실패가 아니라 관객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 인생의 장터에서 은혜의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때로는 요한처럼 거친 광야의 소리로,
때로는 예수님처럼 다정한 식탁의 초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문제는 주님의 연주가 아닙니다.
그 연주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죽어버린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비난하는 자인가, 반응하는 자인가?
혹시 여러분도 하나님을 '내 기준'이라는 감옥에 가둬두고 평가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내 기도는 이렇게 안 들어주시지? 왜 교회는 저 모양이지?"라며 비난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여러분은 장터의 구경꾼일 뿐입니다.
지혜는 말로 증명되지 않고 '행한 일'로 증명됩니다.
주님의 피리 소리에 맞춰 기쁘게 순종의 춤을 추십시오.
주님의 애통함에 맞춰 함께 가슴을 치며 우십시오.
그 반응하는 삶이 맺는 열매가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지혜는 행한 일로 증명된다"
결론 — 감옥 같은 인생에서 실족하지 않는 복
세례 요한은 차가운 감옥에서 주님께 질문을 던졌지만,
주님은 그 질문을 오히려 천국의 문을 여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요한의 의심은 불신이 아니라, 더 깊은 확신으로 가기 위한 진통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요한의 감옥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미래
간절히 기도해도 상황은 요지부동인 현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게 맞나?"라는 근원적인 회의...
그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오늘 이 약속을 건네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6)
주님은 지금 당장 여러분의 감옥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어두운 감옥 안에서 주님을 놓지 않도록, 주님이 먼저 여러분의 손을 꽉 붙들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비난하는 세대 속에서 춤추는 자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 무감각한 세대를 보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의 믿음을 비웃고, 주님의 일하심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반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이 은혜의 피리를 부실 때 기꺼이 순종의 춤을 추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자리에서는 함께 가슴을 치며 우는 민감한 제자가 되십시오.
천국은 지식으로 연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오늘, 다시 주님께 반응하며 그 나라를 여러분의 삶으로 끌어오십시오.
묵상질문
1. 요한처럼 "주님, 정말 살아계신 게 맞나요?"라는 질문이 튀어
나올 만큼 내 삶이 '감옥'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2. 내가 기대했던 응답의 방식과 주님이 실제로 일하시는 방식이 달라서 실족(실망)할 뻔했던 경험은?
3. 내 상황이 당장 변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여전히 다른 곳에서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나에게 왜 '복'이 되나요?
4. 요즘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침노(오픈런)'하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가요?
5. 요즘 나의 영적 감각이 무뎌져 예배나 말씀에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6. 주님의 피리 소리(은혜의 사인)에 반응하여 내가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감옥의 벽을 넘어 주님을 신뢰하는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인생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세례 요한의 정직한 고백을 우리의 기도로 드립니다.
사실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 내 계획을 승인해 주는 메시아만을 기대해 왔음을 회개합니다.
기도가 더디 응답되고 현실의 벽이 높아질 때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며 원망의 감옥에 갇혀 지냈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비실족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눈앞의 감옥 문이 당장 열리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맹인을 보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는 온 세상의 구원자임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내 기대와 주님의 방식이 어긋날 때,
그것이 나를 외면하시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내 좁은 생각을 깨뜨리시고
더 크고 영광스러운 일을 성취하시려는 주님의 열심임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짙은 안개 속에서도 등대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우리 인생의 안개 너머에서 여전히 신실하게 빛나고 계시는 주님을 끝까지 붙들게 하옵소서.
무감각한 이 세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피리 소리가 들릴 때 기쁨으로 춤추게 하시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현장에서 함께 가슴을 치며 울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 청년들에게 주시옵소서.
비난과 조롱의 장터에 주저앉아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두기 위해 치열하게 천국을 침노하는 영적 열정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말의 잔치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지혜는 행한 일로 증명된다" 하신 말씀처럼,
우리 삶에 맺히는 순종의 열매와 사랑의 흔적들이 우리가 예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하옵소서.
감옥 벽에 가로막혀 낙심하던 자들이 일어나,
이제는 그 벽을 뚫고 흐르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파송된 사도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을 붙들어 확신으로 인도하시며,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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