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QT

마태복음 5장 1절 - 16절 천국 시민이 살아가는 방식

by Lily00112233 2026. 1. 20.

태복음 5 : 1~16 천국 시민이 살아가는 방식



팔복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내용 요약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가장 유명한 가르침인 '산상수훈'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복과는 전혀 다른 '팔복'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 시민의 내면적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러한 성품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시며,

성도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음을 명시하십니다.

2. 역사적 구조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듯,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을 선포하십니다. 

'앉으셨다'는 것은 당시 랍비들이 가르침을 베풀 때 취하던 공식적인 자세입니다.

팔복의 역설: 당시 유대인들은 부와 건강, 권력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 애통, 박해를 복이라고 선언하심으로 가치관의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소금과 빛: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필수적인 보존제였고, 빛은 길을 안내하는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이는 성도가 세상 속에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필수적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천국 시민의 내면: 팔복 (5:1~12)
신학: 팔복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존재의 문제를 다룹니다.
전반부(3-6절): 하나님과의 관계(겸손, 애통, 온유, 의에 대한 갈망).
후반부(7-10절): 이웃과의 관계(긍휼, 청결, 화평, 박해를 견딤).
약속: 각 복에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으며, 이는 현재적 누림과 미래적 완성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② 천국 시민의 사명: 소금과 빛 (5:13~16)
신학: "너희는 소금과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노력을 통해 얻는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정체성입니다.

영향력: 소금은 녹아야 맛을 내고, 빛은 비추어야 어둠을 몰아냅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은 도덕적 우월감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팔복은 우리가 지켜야 할 무거운 숙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시민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명단입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진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으로 인해 비워진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청년설교

 

 

가치관의 전복, 행복의 재정의 :천국 시민은 이렇게 산다
–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
(본문: 마태복음 5:1–16)

 

"우리는 어느 나라 소속으로 살고 있는가?"

"뒤처지면 끝나는 거 아닐까?"

"이 정도 스펙은 있어야 사람 대접받는 거 아닐까?"

여러분, 우리 청년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공식' 앞에서 갈등합니다. 

 

"착하게만 살면 결국 손해 보는 거 아닐까?" 

인스타그램을 켜면 보이는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갓생(God+인생)', 그리고 화려한 소비의 기록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기는 자가 복이 있고, 강한 자가 살아남으며, 많이 가진 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산 위에서 우리의 상식을 정면으로 뒤엎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 

 

이것은 단순히 힘든 이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가치관의 혁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의 행복 기준은 세상의 조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인가? 

나는 지금 세상 시민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천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가?"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역사적·신학적 배경: 낮아짐으로 세워지는 새로운 법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아 가르치시는 이 장면은 구약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전했듯,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인 산상수훈을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적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팔복은 '존재(Being)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네가 무엇을 해야 복을 주겠다"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성품이자,

천국 시민이라면 마땅히 갖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둘째,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말씀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현재적 신분'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 속에서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는 사명을 부여받은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팔복: 행동 지침이 아닌 존재의 선언 (5:1~12)
우리는 흔히 팔복을 "복을 받기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팔복의 본질은 행동 지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정체성 선언'입니다.

즉, "이런 사람이 천국 백성이다"라는 존재의 증명입니다.

① 비워져야 채워지는 행복의 역설 (5:3-6)
하나님 나라의 복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존감이 낮은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철저한 의존입니다.

 

ㅡ영적 배터리 1%의 자각

여러분,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초조함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 배터리 표시등이 '빨간색'으로 변하며 '1%'를 가리킬 때입니다. 
화면 밝기는 어두워지고, 앱은 하나둘씩 멈추며, 곧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필사적으로 충전기를 찾습니다. 
카페에 들어가든, 보조 배터리를 빌리든, 
벽면의 콘센트에 몸을 바짝 붙여서라도  어떻게든 전원에 연결되려고 몸부림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배터리가 
'1%' 남았음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영적 자각입니다. 
많은 청년이 자신의 배터리가 이미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쥐어짜며 무리하게 '앱'을 돌리려 애씁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지", 
"내 노력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
라며 충전기 없이 버티다가 결국 영적인 '블랙아웃'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마음은 차갑게 식고, 관계는 멈추며, 삶의 목적마저 깜빡거리다 꺼져버리는 것이죠.
성경이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단순히 자존감을 낮추는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은 내 힘으로 돌아가는 자가 발전기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 내 인맥, 내 통장 잔고라는 '보조 배터리'도
결국 한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진짜 주인이며
무한한 에너지원이신 '창조주라는 전원'을 찾게 됩니다.

내가 전원에 연결되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세상의 콘센트가 아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를 밀착시키는 것,

그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의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영적 배터리는 몇 퍼센트입니까? 

혹시 방전된 상태로 무의미한 화면만 켜두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 바로 충전기를 찾으십시오. 
하나님이라는 근원적인 전원에 여러분의 인생을 플러그인(Plug-in) 하십시오. 

천국은 자기 힘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풀 충전'된 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단 1분도 작동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가난한 영혼'들의 나라입니다.

 

또한 천국 시민은 죄와 세상의 아픔에 무뎌지지 않는 '애통함'을 가집니다.

세상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타협하지만,

주님은 눈물 없는 신앙을 성숙이라 부르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힘을 하나님께 길들인 '온유함'으로 다스리고,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뜻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때,

비로소 천국 시민의 배부름이 시작됩니다.

② 흘려보내야 지켜지는 관계의 역설 (5:7-12)
천국 시민권은 예배당 안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긍휼과 청결, 화평은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ㅡ소유하는 사해인가, 유통하는 갈릴리인가?

이스라엘에는 아주 흥미로운 지형적 대조가 있습니다. 

북쪽에는 생명력이 넘치는 '갈릴리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 '사해'가 있습니다.

신비로운 점은 이 두 곳이 모두 똑같은 요단강 줄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근원에서 같은 물을 받는데,
왜 한 곳은 생명의 보고가 되고 다른 한 곳은 죽음의 땅이 되었을까요?

그 차이는 바로 '흐름'에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요단강 물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물을 다시 낮은 곳으로 흘려보냅니다. 물이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호수는 늘 맑고 신선하며 수많은 물고기와 생명이 깃듭니다.

그러나 사해는 지형적으로 지표면보다 훨씬 낮아,
들어오는 물을 받기만 할 뿐 나가는 통로가 전혀 없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물은 증발하고 염분만 남으면서,
결국 물은 썩고 어떤 생명도 버틸 수 없는 독한 소금 바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지형적 특징은 우리 청년들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소서, 나를 위로하소서, 
내 문제를 해결하소서"라며 사해처럼 은혜를 안으로만 쟁여두려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신비는 소유가 아니라 '유통'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내 안에 가두어두는 순간부터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나만 아는 은혜, 나만 누리는 축복은 결국 우리 영혼을 비대하고 이기적인 사해로 만듭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받은 은혜를 긍휼과 화평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흘려보냅니다. 

내가 용서받았기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내가 위로받았기에 
아파하는 동료의 손을 잡는 '영적 갈릴리'의 삶을 선택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가진 것을 내보낼 때 내 안의 은혜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신선한 생명력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디를 닮아 있습니까?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 영적으로 시들어가는 사해입니까,
아니면 긍휼과 화평의 통로가 되어 주변을 살려내는 갈릴리입니까?
복은 움켜쥐는 자의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자의 것입니다.

이번 주, 여러분에게 고인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영혼은 비로소 죽음을 이기는 갈릴리의 생명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박해'를 복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와 천국의 가치가 충돌할 때 오는 불편함은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이 세상 소속이 아니라 천국 시민이라는 확실한 '시민권의 흔적'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보상이 이 땅의 평가가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지금 무엇에 굶주려 있는가?"와 "너의 신앙은 관계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가?"를 도전합니다.


소금과 빛: 천국 시민의 존재 목적 (5:13–16)
팔복을 통해 천국 시민의 내면을 정의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정체성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화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숙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정체성은 우리가 쟁취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선물입니다.

① 소금: 부패를 늦추는 조용한 저항 소금은 요란하게 소리 내지 않습니다. 

국물 속에 들어가 형체 없이 녹아버리지만, 그 결과로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지배하라고 부름받은 정복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썩지 않게 붙들라고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누군가 "그래도 저 사람 때문에 이 조직이 무너지지 않고 지켜진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입니다.

② 빛: 방향을 보여주는 존재 자체의 증언 빛의 역할은 단순합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가야 할 길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빛 역시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저 켜져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삶은 화려한 말의 설명보다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ㅡ노이즈 캔슬링을 넘어, 세상의 신음 속으로

요즘 청년들에게 필수 아이템이 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입니다. 
지하철의 소음, 카페의 웅성거림, 듣기 싫은 잔소리까지 
버튼 하나로 완벽하게 차단해 줍니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적막 속에서 내가 원하는 음악에만
몰입하는 그 쾌적함은 때로 우리에게 큰 안식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노이즈 캔슬링' 모드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소음은 꺼버려라. 
너의 성공과 너의 안위라는 음악에만 집중해라. 그것이 똑똑하게 사는 법이다." 

이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예배당 안의 고요함에는 안주하지만, 
예배당 밖  세상이 내뱉는 아픈 신음 소리에는 철저히 무감각해집니다. 

나만의 영적 세계에 빠져 세상의 부패와 어둠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세상의 소음 한복판으로, 

그 갈등과 눈물의 현장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국물 속에 들어가 형체 없이 녹아야 하고, 
빛이 어둠을 밝히려면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세상의 고통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의 소리를 듣고 
그 한복판에서 나를 녹이고 태우는 삶.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착한 행실'입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목소리를 지워버릴 때, 
여러분이 그 노이즈 캔슬링을 끄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곁을 지켜준다면 
세상은 비로소 질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이 소란스러운 곳에서 당신은 왜 여전히 우리 곁에 있나요?"
그때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대답이 될 것입니다.

"너를 보니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는 고백은 우리가 화려한 말로 전도할 때가 아니라,
소음 가득한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의 울림입니다.

이번 한 주, 노이즈 캔슬링을 끄고 주님이 머무시는 낮은 곳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곳에서 당신의 빛은 가장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세상 속에 파송된 천국 시민: 당신의 빛을 숨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셨습니다.

팔복이 우리가 가져야 할 '내면의 지도'라면,

소금과 빛은 우리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외부적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 방식으로 성공해서 이름을 떨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가치'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보이게 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말 아래 숨겨둔 빛 혹시 미움받을까 봐,

혹은 손해 볼까 봐 여러분의 성도라는 정체성을 말 아래 꽁꽁 숨기고 있지는 않나요?

세상의 성공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금이 맛을 잃고 빛이 꺼지는 길입니다. 이제 다시 팔복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주님, 더 소유하려는 탐욕을 버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겠습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나를 녹여 소금의 맛을 내고, 

나를 태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빛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팔복 방식을 선택하는 

그 순간, 세상은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세상을 밝힐 빛입니다. 그 빛을 꺼내어 세상을 향해 비추십시오.



묵상 질문


   오늘 나의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조건'에 달려 있나요, 아니면 주님이 선포하신 '성품'에 달려 있나요?

 

   내 인생의 배터리가 1%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오직 주님께만 충전을 구하는 '가난한 심령'이 내 안에 있나요?

 

   내가 화낼 수 있고 밀어낼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하나님께 길들여진 온유함으로 절제하고 있나요?

 

   나는 은혜를 받기만 하는 '사해'입니까, 아니면 긍휼과 화평으로 흘려보내는 '갈릴리'입니까?

 

   이번 주 내가 속한 곳(가정, 직장 등)에서 부패를 막고 분위기를 지켜내기 위해 내가 녹아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나는 성도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있나요, 아니면 나의 행실을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고 있나요?

 


 


다른 나라의 가치로 세상을 밝히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주님,

세상이 말하는 복을 쫓느라 심령이 메마르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해 불안해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세상의 성공 방식이 아닌 주님의 팔복을 우리 삶의 지도로 삼기 원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 천국을 경험하게 하시고, 애통해할 때 하늘의 위로를 맛보게 하시며, 

온유함으로 세상을 품는 넉넉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은 자격이 아니라 주님이 부여하신 신분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소금처럼 조용히 녹아져 부패를 막고, 빛처럼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손해 볼까 봐, 미움받을까 봐 주님의 빛을 바구니 아래 숨겨두었던 겁쟁이 같은 모습을 벗어던지고, 

담대히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의 의로움을 뽐내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비치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 세상 속에 파송된 천국 시민으로서 

"너를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는 고백을 듣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빛이시며 참된 복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