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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13절 - 23절 핍박 가운데 성취되는 하나님 말씀

by Lily00112233 2026. 1. 15.

마태복음 2 : 13~23 핍박 가운데 성취되는 하나님 말씀



헤롯의 잔인함 2:13~18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나사렛 사람 예수님 2:19~23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성탄의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참혹한 비극과 그 속에서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룬 마태복음 2:13~23을 살펴보자면

 

1. 내용 요약
본문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광기 어린 박해와 그로부터 아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룹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밤에 급히 애굽으로 피신하며, 헤롯은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영아들을 학살하는 참극을 저지릅니다. 헤롯 사후, 요셉은 다시 신적 지시를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오나 아켈라오의 위협을 피해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2. 역사적 구조
헤롯의 광기와 영아 학살: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대왕은 죽기 직전까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살해했습니다. 베들레헴 영아 학살은 그의 잔혹한 성격과 일치하는 역사적 개연성을 가집니다.

애굽(이탈리아 외 최대 유대인 거주지): 당시 애굽(이집트)은 헤롯의 관할권 밖이었으며,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어 피신처로 적합했습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던 역사적 경로를 역행하는 상징성을 띱니다.

아켈라오: 헤롯의 아들 중 가장 잔인했던 인물로, 즉위하자마자 유대인 3,000명을 학살했습니다. 요셉이 유대 지역(베들레헴)으로 가기를 무서워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역사적 판단이었습니다.

3. 신학적 구조
① 제2의 모세, 제2의 출애굽 (2:13~15)
신학: 마태는 예수를 '새로운 이스라엘'이자 '완성된 모세'로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듯(호 11:1),

예수님 또한 애굽에서 나옴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의 삶으로 재현하고 완성하십니다.

② 라헬의 통곡: 고난받는 메시아 (2:16~18)
신학: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하며 베들레헴의 비극을 다룹니다. 메시아의 탄생이 세상 권력자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이 뒤따르는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는 장차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주님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③ 낮아짐의 정점: 나사렛 사람 (2:19~23)
신학: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구체적인 구절은 구약에 없으나, 학자들은 이를 '가지'를 뜻하는 '넷체르(Netzer, 사 11:1)' 혹은 멸시받는 비천한 자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의미: 메시아가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소외되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에서 자라나심으로써 낮은 자들을 위한 구주임을 선포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은 방해하나, 하나님은 성취하신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헤롯은 칼을 휘둘러 하나님의 계획을 끊으려 했으나, 그 칼날조차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애굽 피신, 나사렛 정착)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에 닥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도망의 시간들조차 하나님의 정교한 설계도 안에 있음을 본문은 웅변하고 있습니다.


청년설교

도망치는 자리에서 쓰여지는 하나님의 각본

( 핍박 가운데 성취되는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2 : 13~23)

 

도망치는 인생, 그 막막함에 대하여
축제 뒤에 찾아온 당혹스러운 불청객,

우리 인생에는 참 잔인한 법칙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축제는 짧고 고난은 길다'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경험했던 수련회 직후에 생각지도 못한 가정 문제가 터지거나,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했던 취업의 문턱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실 때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하나님, 방금 전까지 저와 함께 계시다고 하셨잖아요?"라는 배신감 섞인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왜 내 삶은 자꾸 뒤걸음질인가? 청년들과 상담하다 보면 이런 고백을 자주 듣습니다.

"제 인생은 자꾸 어디론가 도망치는 것 같아요." 취업에 실패해서 고향 집으로 도망치듯 내려가고,

관계가 깨져서 사람들로부터 숨어버리고, 반복되는 죄 문제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남들은 다 저 앞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데, 나만 거꾸로, 혹은 엉뚱한 방향으로 도망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내 인생은 실패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예수님의 인생도 '도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첫 페이지가 화려한 등극이 아니라 '밤의 도주'였다는 사실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가져온 황금과 유향의 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아기 예수는 목숨을 구걸하며 국경을 넘는 '난민'의 신세가 되어 애굽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던져야 할 질문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지켜주지 않으시고 도망치게 하셨는가?"
"만약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라면, 왜 그 길은 이토록 비참하고 구차해 보이는가?"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품고, 도망치는 요셉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어쩌면 그 비참한 도망길 속에, 여러분의 막막한 현실을 해석할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망치는 발걸음 소리 위에 흐르는 섭리

 

헤롯의 폭력,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헤롯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의 어린 생명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내 자리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에만 분노했습니다. 

이것이 헤롯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시스템'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마주하는 세상도 헤롯과 닮아 있습니다. 

성과 압박, 끝없는 경쟁, 비교를 통한 불안 조성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회사 구조조정
실적 때문에 갑자기 해고된 직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잔인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이런 비정한 시스템 한복판에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잔인함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애굽 피신,하나님은 왜 싸우지 않고 도망치게 하셨나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천사 군대를 보내 헤롯을 멸하는 

대신, "일어나 애굽으로 피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독특한 인도 방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앞의 위험을 제거하기보다, 그 위험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요셉은 그 즉시 "밤에" 일어났습니다. 

GPS와 안개길
안개 낀 밤길에서 GPS는 목적지까지의 전 구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직 '다음 100m'만 보여줄 뿐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그곳에서 어떻게 먹고살지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떠나라'는 그 한 걸음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신앙은 전체 지도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도하시는 분의 손을 쥐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예수는 기꺼이 난민이 되심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해 불안해하는 우리의 인생 경로를 품어주셨습니다.

   라헬의 통곡, 하나님은 왜 비극을 막지 않으셨나
성경은 베들레헴의 비극을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무고한 아이들이 죽었고,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라마까지 들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봅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기 전에, 그 눈물 속에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는 이 참혹함을 예레미야의 예언과 연결합니다. 

카펫의 뒷면
카펫의 뒷면은 실타래가 무질서하게 엉켜 있어 흉측해 보입니다.
하지만 앞면에는 정교한 문양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영아 학살이라는 비극은 카펫의 뒷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하나님은 그 아픔의 실타래를 사용해
'고난받는 메시아'라는 구원의 지도를 짜고 계셨습니다.
예수는 고통 없는 진공 상태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 비명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메시아입니다.

 

헤롯(세상)은 우리를 위협하지만,
요셉(성도)은 그 어둠 속에서도 즉각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 통곡의 현장을 구원의 각본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왜 예수는 변두리에서 자라셨나 
헤롯이 죽고 이제 평화가 오나 싶었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라는 또 다른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가족이 흘러 흘러 정착한 곳은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의 아주 작고 가난한 동네 '나사렛'이었습니다.

당시 나사렛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며 

비웃음 당하던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왕을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닌, 

그 비천한 변두리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스타트업의 차고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 기업들은 화려한 빌딩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기름때 묻은 차고와 좁은 골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차고를 보며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그 변두리에서 세상을 바꿀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준비되던 '거룩한 차고'였습니다.

 

진주를 만드는 상처
조개 안에 들어온 거친 모래알은 조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조개는 그 아픈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진액으로 감싸 안습니다.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을 때, 그 상처는 단단하고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은 상처와 수치였으나,
하나님은 그 낮은 자리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는 보석 같은 은혜를 빚어내셨습니다.

 

결국 마태복음 2장의 마지막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결코 길을 잃지 않으십니다. 애굽으로의 피난도, 라마의 통곡도,

나사렛의 비천함도 모두 하나님의 각본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이 처한 '비참한 현실'이라는 나사렛 속에서 여러분을 자라게 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변두리 인생'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세상을 바꿀 진주를 빚고 계십니다.


 

 

— 지금 당신의 애굽은 어디인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직후에 벌어진 긴박한 ‘도망의 경로’를 함께 따라왔습니다.

헤롯의 칼날을 피해 밤에 떠났던 애굽,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비명이 가득했던 라마, 그리고 결국 정착한 변두리 나사렛까지.

이제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애굽은 어디입니까?” 

혹시 취업 실패라는 헤롯을 피해 고향 집이라는 애굽으로 숨어들지는 않았습니까? 

관계의 상처를 피해 혼자만의 동굴이라는 나사렛으로 도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 도망의 길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입니다. 

요셉이 밤에 일어나 아기를 데리고 떠났을 때, 

그 길은 비참한 피난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호의 경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그 도망의 시간, 

그 광야 같은 자리는 길을 잃은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정교한 섭리가 작동하고 있는 ‘각본의 현장’입니다.

복음의 결론, 나사렛에서 피어나는 진주
세상은 나사렛에 머무는 여러분을 보며 “실패자, 변두리 인생”이라 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낮은 자리, 그 수치스러운 별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빚어내셨습니다.

헤롯의 칼날은 매서웠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끊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는 구약의 정점으로 인도했습니다.


인생을 위협하는 상황(헤롯)보다, 그 상황을 도구 삼아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십시오.

 


묵상질문

지금 내 삶에서 '헤롯의 칼날'처럼 나를 위협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사람, 경제적 압박, 미래의 불확실성)은 무엇인가요?


요셉은 앞이 보이지 않는 밤에 즉각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내 상식과 다를 때, 계산을 멈추고 즉각 순종해 본 경험이 있나요?

하나님은 위험을 제거하기보다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애굽(잠시 멈춤, 보호의 장소)'은 어디이며,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이해할 수 없는 비극(라마의 통곡)을 겪을 때, "하나님은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그 속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나요?

나는 지금 예루살렘(중심지, 성공)을 갈망하나요, 아니면 하나님이 보내신 나사렛(변두리, 소외된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있나요?

예배를 마친 후, 내가 습관적으로 걸어오던 '헤롯의 길'을 버리고 오늘 새롭게 결단하며 걸어가야 할 '하나님의 경로'는 무엇입니까?


 

도망의 길에서 만나는 당신의 손길
인생의 모든 경로를 주관하시며, 

고통의 눈물 속에서도 구원의 지도를 그려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탄의 화려한 조명이 꺼진 뒤 찾아온 피난과 통곡의 현장을 목도합니다. 

주님, 우리 청년들의 삶이 요셉의 피난길처럼 위태롭습니다. 

밤마다 몰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헤롯처럼 우리를 짓밟는 세상의 무거운 시스템 앞에서 우리는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주님, 우리가 도망치는 그 자리가 결코 버려진 자리가 아님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밤에 떠나는 그 막막한 발걸음 소리 위로, 

“내가 너를 불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극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심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화려한 예루살렘 왕궁이 아닌 초라한 나사렛에 머물 때,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비웃음과 상처라는 모래알을 감싸 안아 영롱한 진주를 빚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세상의 조롱 속에서도, "나사렛 사람 예수"가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음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 낮은 자리에서 당당히 일어서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를 위협하는 헤롯(상황)보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게 하옵소서. 

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각본을 따라 걷는 순례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머무는 이 척박한 나사렛이 주님의 뜻이 아름답게 성취되는 거룩한 처소가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시며, 

도망치는 우리를 끝내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