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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장 13절 - 21절 성령 안에서 이루는 온전한 사랑

by Lily00112233 2026. 1. 7.

 

요한일서 4 : 13~21  성령 안에서 이루는 온전한 사랑

 

 

사랑 안에서의 삶 4:13~16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온전한 사랑과 담대함 4:17~21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 내용 요약
본문은 하나님과 성도의 상호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과 '성령'의 역할을 다룹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믿음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심판 날에 두려움 없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사랑은 반드시 형제를 향한 수직적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선포합니다.

2. 역사적 구조 
성령의 증거: 당시 가현설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며 주관적인 영적 체험만을 강조했습니다. 요한은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증거는 결국 '예수가 구주이심을 시인하는 것'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남을 역설합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 박해와 이단의 공격 속에서 공동체원들이 가졌던 종말론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주는 심리적, 영적 안정감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결속을 꾀합니다.

거짓 신앙의 판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공동체 내의 형제를 미워하는 이단적 태도를 '거짓말'로 규정하며, 가시적인 형제 사랑을 공동체의 유일한 판별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3. 신학적 구조
연합의 확증: 성령과 시인 (4:13~16)
상호 내주: 성령을 통해 "우리가 주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기독론적 고백: 하나님과의 연합은 막연한 명상이 아니라, 예수를 '세상의 구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구체적인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임을 선포합니다.

사랑의 효능: 두려움을 내쫓는 담대함 (4:17~19)
온전한 사랑: 사랑이 성도 안에서 성숙해질 때,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한 공포는 '담대함'으로 바뀝니다.
두려움과 형벌: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증거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성도는 심판의 두려움이 아닌, 주님과의 친밀함을 동력으로 삼습니다.
은혜의 우선성: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선행적 은총)입니다.

사랑의 윤리: 가시적 형제 사랑 (4:20~21)
신학적 정직성: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형제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형제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신학적 허구에 불과합니다.
계명의 통합: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별개의 계명이 아닌, 하나의 통합된 계명으로 묶어 성도의 필수적 의무로 제시합니다.


정체성 → 연합 → 담대함 → 사랑의 증거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구성됩니다.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 —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의 삶

(요한일서 4 : 13~21)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관계의 깨어짐, 혹은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라는 영적인 불안함인가요?

우리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두려워하며 삽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은 그 두려움을 종식할 유일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뒤바꾸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입니다.

  신앙을 오래해도 남아있는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을까 하는 두려움
  심판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

 

요한의 선언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18절)

 


오늘 설교는 “더 사랑하자”라는 윤리 설교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성령이 확증하는 연합 — 주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4:13–16)

 

가현설(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과 박해로 인해 흔들리던 요한 공동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요한은 성령, 시인(고백), 사랑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 안에 거할 때만 인간은 심판과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 상호 내주 (4:13~16)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며, 예수를 주로 시인할 때 시작됩니다.

바닷물 속에 스펀지가 잠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스펀지는 거대한 바다 안에 있고, 동시에 바닷물은 스펀지의 구멍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바다에 잠길 때,
그 사랑은 우리 존재의 모든 틈새를 채우고, 아픈 상처와 깊은 빈자리까지 스며듭니다.
스펀지가 바다 안에 있고 바다가 스펀지 안에 있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15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위에 성령께서 도장을 찍으시고,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있다"라고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붙든다"가 아니라
→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붙드신다.

성령은 연합의 증거자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

 와이파이 신호등 이야기
어떤 청년이 해외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지도 앱은 있는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러다 한 카페 와이파이에 연결되는 순간,
길이 보이고, 방향이 보이고, 길을 찾았습니다.

 

성령의 내주함 = 신호가 연결된 상태
방향이 보이고 정체성이 확인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재형”이 됩니다.

사랑은 감정 이전에 관계적 현실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16절)

사랑은 행동이 아니라 먼저 ‘자리’를 바꾸는 것
→ 미움의 자리에서 사랑의 자리로


온전한 사랑 — 두려움을 내쫓는 담대함 (4:17–19)

 

온전한 사랑은 심판 날의 공포를 담대함으로 바꿉니다.

두려움은 형벌을 예상할 때 생기지만, 사랑은 이미 용서받았음을 알기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폭풍우 속의 아이
천둥 번개가 치는 밤, 혼자 있는 아이는 공포에 떱니다. 
하지만 엄마의 품에 안기는 순간, 밖의 폭풍우는 더 이상 아이를 떨게 하지 못합니다. 
폭풍이 멈춰서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 아이의 두려움을 집어삼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폭풍 속에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품입니다.

 

 시편 27편 1절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안고 계시기에, 우리는 심판 앞에서도, 세상의 풍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19절은 그 원천을 밝힙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 우리의 두려움을 집어삼킵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17절)
두려움의 뿌리 = 형벌 의식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요한의 복음적 선언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19절)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First Love)

입양아의 품 유무 테스트
어린아이가 넘어졌을 때
“혼날까?”라고 생각하며 숨는 아이가 있고
“엄마 품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있습니다.

 

둘 다 넘어졌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이 다른 것입니다.

복음은 “넘어졌느냐?”를 묻기 전에
“다시 품으로 오느냐?”를 묻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담대함이며,
담대함은 사랑의 확신에서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 → 보이는 형제 사랑 (4:20–21)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수평적인 형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의 진실성은,

내 곁에 있는 '보이는 형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태양(하나님)을 직접 쳐다볼 수는 없지만, 
거울(성도)이 태양 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방을 비추는 것을 보면 태양이 떠 있음을 압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빛을 반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빛 앞에 서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라.” (20절)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오늘 내 곁에 있는 — 때로는 불편하고 서운한 —
그 형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증명됩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진짜’가 됩니다.

요한의 도전
“사랑의 목표는 의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은혜는 ‘자리’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닫혀 있지 않은가?
내 신앙은 관계 회복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할 힘이 없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묵상하십시오.

우리의 사랑은 결의에서 나오지 않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자리에서 흘러나옵니다.

 —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오늘 우리는 이렇게 결단합니다.
나를 옥죄는 두려움을 주님의 사랑 앞에 내려놓기

그리고 오늘, 내가 미워했던 누군가를 위해
작은 사랑의 행동 하나를 선택하며 기도하기

   나는 두려움의 자리에서 사랑의 자리로 이동하고 있는가?
   신앙은 머릿속 개념인가, 관계 속 실재인가?
   하나님 사랑이 사람 사랑으로 번지고 있는가?
   나는 성령의 내주를 관계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고립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먼저 사랑하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유와 담대함을 누리는 청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도전 
✓ 이번 주 한 사람에게
→ 미움 대신 축복의 말 선택하기

✓ 불편했던 관계 한 사람
→ 마음 닫지 않고 기도부터 시작하기

✓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되
→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순종하기

심판의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성령의 내주를 의식하며 살게 하소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을 감정이 아닌 관계와 행동으로 살게 하소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거처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할 때
두려움은 떠나가고, 사랑은 관계로 흘러간다.

 


묵상질문

 

  바닷속의 스펀지 예화처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연합의 신비'를 성령의 감동으로 깊이 느껴본 적이 있나요?
  현재 당신의 마음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미래, 관계, 죽음, 심판 등)

그 두려움은 당신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폭풍우 속 아이가 엄마 품에서 평안을 찾듯,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당신의 특정 두려움을 몰아냈던 구체적인 간증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9절)"이라고 말합니다.

내 의지가 아닌 주님의 '선행적 은총'을 깨달을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2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도저히 사랑하기 힘든 '내 곁의 형제'는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바 아버지 하나님,
불안과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 척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 청년들을 주님의 온전한 사랑이라는 안전한 포구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연약한 우리가 전능하신 주님 안에 거하는
이 신비로운 연합의 복을 허락하셨습니까.
이 시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주님,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수많은 두려움 앞에 중보합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공포,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불안,
그리고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했던 우리의 떨리는 마음을
주님의 손으로 안아 주시옵소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듭니다.
심판의 공포가 아닌 자녀의 담대함으로 주 앞에 서게 하시고,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엄마 품에 안긴 아이와 같은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압도적인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지피게 하옵소서.

그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이제는 고개를 들어 내 곁의 형제를 바라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때로는 상처를 주고,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그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청년들이 머무는 곳마다
미움과 시기가 사라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거룩한 거울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작은 나눔과 섬김을 통해
세상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하옵소서.

오늘 이 자리를 나서는 청년들의 발걸음을
주님 장중에 붙드시고,
한 주간의 삶 속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내가 너를 먼저 사랑하였고, 내가 네 안에 있다” 하시는
주님의 확신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온전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